나의 첫 번째 타투

고유한 존재로서 유일무이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기

by 하리타

삶은 결국 스스로를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빚어나가는 긴 여정인 것 같다. 또한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제 나름대로 활개 치며 살 조건들을 갖춰나가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2년 전 쯤, 새로 들어간 커뮤니티에서 '10문 10답' 질문지에 맞추어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자신의 강점을 적는 문항에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향.' 우리는 매 순간 주변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고 살지만, 결국에 그것은 각자의 고유한 감각 체계를 거쳐 고유한 생각, 감정, 행동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뚜렷하게 자기 의견과 선호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며 사는 자립, 스스로 서 있는 (selbständig) 상태가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얽매이지 않고 (unabhängig) 자유로운 것도. 8년 만에 고향인 서울로 돌아와 살면서, 이 애증의 도시가 만들어내는 거센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시기 정리해본 생각이다. 당시 내 내면에 존재하던 긴장은 꽤나 팽팽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긴장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버렸다. 문득 자연스럽게, 내 몸에 어떤 타투를 하고 싶은지 알게 된 것이다. 그 전에 족히 5년 동안 타투를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새길지 못 정해서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8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줄무늬를 타투로 그려 넣기로 했었다. 1978년 6월 25일 '게이 자유의 날 (Gay Freedom Day),' 샌프란시스코의 한 광장에서 최초로 휘날린 레인보우 프라이드 플래그를 본 딴 모양이다. 손바느질에 능하고 재기발랄한 데모 의상을 잘 만들던 길버트 베이커 (Gilbert Baker) 가 당시 시의원이자 미국 최초의 게이 정치인인 하비 밀크(Harvey Milk)의 의뢰를 받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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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지 색깔에는 각각 의미가 있다. 핑크-섹슈얼리티, 빨강-생명, 주황-치유, 노랑-태양, 초록-자연, 청록-예술과 마법, 파랑-평화, 보라-영혼.


그리고 그 최초의 깃발을 만든 길버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새로운 통찰 속에서 그 깃발에 대해 생각했다. 그 깃발에서 깊은 힘과 시대와 형태를 초월하는 가치를 보았다. (I thought of flags in a new light. I discovered the depth of their power, their transcendent, transformational quality.)"

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어디선가 읽고 나는 순식간에 감화되었다. 색깔과 단어가 매치된 이 목록은 내게 중요한, 이제껏 나를 보호하고 응원해온 가치들과 딱 들어맞아, 반갑고 놀라웠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들이 한데 모여 있는 8가지 색깔 줄무늬, 레인보우. 이것이 내 몸의 일부가 되게 하기로 했다. 내가 온전하고 (wholesome) 퀴어하게 살 수 있도록, 바늘이 8개 달린 나침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침 당시 살던 집 앞에 타투샵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운영자를 만났다. 15년 째 타투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던 그는 올드 스쿨(old-school)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타투샵이 밀집한 홍대 같은 곳이 아니라 다소 쌩뚱맞은 그곳 양재동 빌라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에게도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이 중요한 문제였을까? 신용카드 크기만한 풀컬러 타투의 가격이 20만원. 강력한 부적을 하나 얻는데 그 정도면 값이 쌌다.


그래서 결국 나는 타투를 했을까. 했다, 했고, 이 아픔을 그럭저럭 잘 참은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게 가장 지배적인 소감이었다. ㅇㅇ을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다는, 그래 그거.

첫 경험으로도 알 수 있었다. 7.5 헤르츠의 진동과 압력으로 피부 밑을 찌르고 긁어대는 바늘이 여타의 근심과 잡생각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여기’에 있게 해줬다. 자기 선택으로 기꺼이 아프면서 어떤 면죄부를 얻는 느낌이 각별했다. 팔에 맺히는 핏방울을 응시하는 동안 게으름에 대하여, 비겁함에 대하여, 행동하지 못함이나 머무름, 지지부진함에 대하여 생각했다. 자긍심도 느껴졌다. 나는 강해. 이것을 잘 참을 만큼. 피부에 새길 의미를 골라낼 만큼. 그것을 전시할 만큼. 그러니까 한마디로 타투를 그려넣는 일은 “아픈데 시원해요.”... 안전하고 편리한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그 정도로 강렬한 감각을 갖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상은 지루한데 타투를 하는 동안에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타투는 내 뜻대로 행할 수 있고 또렷한 흔적마저 남는다. 물리적 폭력이 금기시 되는 사회에서 타당한 힘은 오로지 타투와 스포츠뿐이라는 단순한 통찰마저 나를 은밀하게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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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 새김은 통쾌하다. 통쾌, 관통하는 쾌감. 동의서 한 장 쓰지 않고, 현금으로 간편하게, 비싸지도 않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타투였다. 헤비메탈, 락앤롤, 지속적인 자극. 핏방울, 점, 선, 면...고유한 존재로서 유일무이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기에 타투는 꽤나 적절한 방법이다. 고통이야말로 실존하는 어떤 존재가 오롯이 ‘홀로’ 느끼는 감각이니까.


나는 그렇게 내 몸에 8가지 색깔 줄무늬 레인보우를 얻었다. 핑크-섹슈얼리티, 빨강-생명, 주황-치유, 노랑-태양, 초록-자연, 청록-예술과 마법, 파랑-평화, 보라-영혼.


젠장, 이거 너무 근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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