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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Jan 14. 2021

아무것도 한 게 없는 하루.

나를 위한 삶이 없는 것 같을 때.

2021년 1월 5일 화요일.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되는 일기를 썼다.




둘째의 어린이집 방학이 한창이라 내가 처음으로 독박 육아를 시작한 무렵이다.


첫째는 새로 바뀐 유치원을 두 번째로 가는 날이자 처음으로 발레 학원을 가는 날이었다. 원래 10분 거리의 공립 유치원에서 버스가 왔었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 좋은 선생님들,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코로나로 일 년 동안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하고, 단순한 7살이 아닌 요즘 표현으로 "예비 초등생"이 된 첫째 아이는 "교육"이 필요할 때가 되기도 했다는 생각에 유치원을 바꾸는 과감한 결정을 했다.


그러나 30분 거리의 사립으로, 시, 군의 경계가 바뀌면서 원의 버스가 오지 않게 되었고, 직접 데려다주어야 한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동네에는 없는 발레학원이 경로상에 위치하게 되어서 발레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대단한 사교육 부모는 아니고, 아이에게 체적으로 건강하게 에너지를 발산할 활동을 시켜주고 싶었다. 아이가 원했고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해한다.


원래는 예전부터 이 학원만 보낼 생각으로 전화를 했더니 처음에는 인기가 좋아서 대기. 6개월 동안 연락이 없길래 다시 연락했더니 코로나로 수강인원을 절반으로 줄여서 대기. 그렇게 1년을 대기했다가 차저차 등 하원을 하기도 하고 렇게 저렇게 해서 여기가 딱 집에 가는 길인데 어떻게 안 되겠냐 하고 사정했더니, 마침 한 타임 자리가 비어서 겨우 수강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아내도 독서실에 내려주고, 둘째를 보다가, 낮잠을 재우고 그동안 겨우 짬을 내어 책장을 조립하고 책을 정리했더니 아이가 깨서 놀아주고, 둘째 옷 입히고 함께 손을 잡고 첫째를 데리러 갔다가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저녁도 나는 다이어트 중이니 대충 먹고 책을 한번 읽어볼까 하고 폈더니, 애들이 놀아달라, 책 읽어달라, 아내가 뭐하냐 애들 좀 봐라, 아니면 집안일을 하던지. 그래서 화딱지가 나서 쓴 게, "오늘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나를 위해"아무것도 한 게 없는 하루였다.


화가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했더니, 사실 대부분의 부모가 다 그렇다. 나를 위한 삶 따위는 희생해버리고 가족을 위해 산다. 그리고 그렇게 지쳐간다.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부모니까. 내 어깨에 달린 가족들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  


우리 아버지는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알아서, 그리고 그 일이 꼭 하고 싶어서, 너무 즐겁고 좋아서, 그래서  40년이나 같은 직장을 다니셨을까? 우리 어머니는 좋기만 해서 집에서 누나와 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사춘기 스트레스를 감내했고 40년 하루 세끼 밥을 차리고, 청소와 빨래 등 살림을 하고 남편이 알아주지도 않는 갱년기 호르몬과 싸우면서 지금은 골다공증 수치를 매번 걱정하며 살아야 하시는 걸까?


우리 모두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참아왔을까. 아내는 점점 다가오는 시험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겨내고 있었을까. 우리 딸은 새로 바뀐 유치원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을까. 놀기만 하다가 공부를 하라니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우리 아들은 무뚝뚝한 아빠와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게 얼마나 심심했을까. 4살 배기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한다고 참고 있는데, 나만 징징거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가 그렇게 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열심히 살겠지, 그런데 정작 "아무것도 못하고"있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늘 "힐링, " "테라피"를 찾아 헤매고 그런 SNS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공감하고 대리 만족하는 게 아닐까. 다둥이 엄마나 워킹 맘도, 명퇴를 앞둔 아빠나 상사 스트레스가 심한 아빠도, 사춘기 청소년의 수험 스트레스도, 학원 뺑뺑이 초등생도, 졸업, 취업, 결혼이 걱정인 2030 세대도. 내 집 마련이 어렵고 고달픈 3040세대도, 그 모두를 키워내고 이제 쉴 줄 알았더니 손주들을 떠맡고, 자녀들을 떠맡은 5060 세대도. 우리는 모두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 모두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한 게 없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요즘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전승환 저. 2020. 다산북스>라는 책을 한 챕터씩 읽는다. 2020년 1월 초판인 책이 11월에 32쇄를 찍었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길래. 그러니 당연히 "나를 위한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뭐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뭐를 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목적 없이 걷고 싶은 하루"(P.95)를 읽었다.


이애경 작가의 에세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에서 한 문장을 소개했다.


"모든 걸음에 반드시

목적지가 있어야 할까?


인생도 산책하듯 그냥 걷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작가는 말한다. "산책에는 다른 목적이 없기에, 목적 없는 그 공간을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또 함께 걷는 다른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매사에 너무 조급하거나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산책을 하듯 천천히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우리에게 필요하지요. 일상의 고민은 잠시 내려두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시간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건 없습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산책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목적지만 바라보고 냅다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산책을 하며 이길로 갈까 저길로 갈까 고민하다 보니 옆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 졌고, 아내를 위로하고 싶어 졌고, 어머니를 수고했다 다독이며 칭찬하고 싶어 졌다. 누나를 걱정하고, 형님을 존경하고, 아내가 독서실에 가고 없을 때 장인어른, 장모님과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을 더 바라보게 되었다.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직도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아버지는 지난 주말에도 뒤돌아 보며 내게 물으셨다. "네가 아직도 그렇게 책이나 읽고 글 쓰고, 지금 그런 거 공부할 때냐?" 네. 그런 마음을 돌아볼 때입니다. 나 대신 뛰고 있는 사람이 많네요. 어젯밤 아내도 내게 물었다. "자기는 요즘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나 알아?" 그러는 자기는 내 마음 알아?라고 맞받아치려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몰라줘서 미안해.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급하고, 초조하고, 긴장되고, 공부에 정신없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무슨 생각하는지는 생각 안 해봤네." 아내가 말했다. "어...... 그래. 맞아."


어제부터 차(Tea)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요즘 요가, 명상과 함께 마음을 돌아보고 나를 찾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좋은 음료가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찻잎을 다루고, 우리고, 향과 맛을 음미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유를 가지게 되고,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찻잎이나 허브의 재배도 농업이고 (나는 농업회사법인의 대표이다), 찻잎이나 허브의 가공이나 포장, 판매도 사업이고, 차 블렌딩도 사업의 다변화고, 찻잎의 수입은 무역이며, 마음 돌봄도 사업 연관성이 얼마든지 있는데, 마음 돌봄을 깨닫고 있다고 아들을 다그친다. 이렇게 사람이 달리기만 하면 여유를 모른다.


우리 모두는 가끔 산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 위해서.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소중한지,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여유를 가지고 숨을 고르며 목적 없는 산책이 필요하다.


지난번에 말한 나의 형님(아내의 오빠)의 점심시간마다 장모님께 드리는 안부 전화도 산책시간에 하는 것이고, 유명한 철학자들 또한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빨리빨리의 나라 한국에서 천천히 걸어보는 여유. 어렵긴 하겠다. 하지만 걸으면 행복이 가까워 질지도 모른다. 우리 대부분은 행복한 일이 없어서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행복이 가까이에 있는 줄 모르기에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나를 알아주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가족 중에 가장 너그럽고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은 나니까, 내가 가족을 먼저 알아주면 언젠가는 가족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가족들이 행복해지는 게,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나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 오늘도 산책을 하면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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