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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Jan 15. 2021

오늘도 상처 입은 나.

마음을 나누어요.

잠깐인데 괜찮겠지 싶어서 그냥 나왔다.

아이의 어린이집 버스는 아직인데 심심하다.

다른 원생 어머니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뻘쭘하다.


폰을 꺼내 들고 뉴스를 읽고 아내와 카톡을 하려다가 손이 시려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잠깐인데 손이 많이 시리다. 수족냉증인가 한겨울인 건가.




오리 농장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된다. 특히나 이렇게 추운 날은 장갑을 끼면 결로가 생겨 공구가 미끄러지고, 맨손은 얼어서 감각이 둔해지고, 손 같은 부위가 상처 기 쉽다. 금속에 맨살이 얼어붙기도 하고, 플라스틱이나 기구가 쪼개져서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살을 에는 바람과 싸우다가, 숨이 턱 막히는 열과 싸우기도 해야 한다.


상처를 계속 입다 보면, 작은 상처는 금방 익숙해진다. 상처 입는 순간의 고통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익숙해진다. 다칠 때에는 여전히 아프다. 다만 그 정도의 상처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뿐이다. 그립감이 좋다는 비싼 장갑도 껴보고,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어보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맨몸처럼 간편하고 일이 잘되는 도구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때로는 흉터가 영광의 상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주로 뭔가 성공적으로 고쳤거나 어렵고 힘든 일을 하다가 얻은 상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혼자 뿌듯한 상처.


어떨 때는 바보같이 고집부리다가,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다가, 귀찮아서 제대로 보호구을 안해서, 또는 실수로 생긴 상처도 있다. 그런 상처들을 보며 지난날을 후회하기도 한다. 상처를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다 아문 상처인데, 마음에 미련만 남은 상처들이다.


어떤 상처는 희미해졌거나 사라져 버린 흉터만큼이나 기억에서도 잊힌다. 왜 다쳤더라, 이게 흉터인가 살이 튼 건가. 모기 물렸던 자린가 아니면 다쳤던 자린가. 굳이 애써 기억할 필요도, 이제는 내 몸에 남아있지도 않는 상처다.


깊은 상처는 상처만큼이나 기억도 생생히 오래간다.


나에게는 왼손 엄지손가락에 수술한 자국이 깊게 남아있다. 첫눈이 함박눈으로 내리던 농장 운영 첫겨울에 급하게 급수관에 열선을 교체한다고 케이블 타이를 자르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그 와중에 그 선홍빛 핏빛이 예쁘다고 생각한걸 보니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손가락 신경과, 인대가 약간 파손되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모두 회복되었다. 손 수술 전문병원을 찾아 대전까지 갔었다. 대전 가는 차 안에서 "하얀 눈꽃이 참 흐드러지게도 피었다."라고 온통 하얗게 덮인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평을 하시던 아버지와, 그날 마침 농장에 와계셨다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어머니께서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오냐."라고 일갈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상처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비단 (포경수술을 제외하고) 내 생에 첫 수술이어서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병원에서는 형식적으로 부작용의 발생 여부를 관찰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며 3일의 입원을 권고했다. 집이 머니까 아예 실밥을 풀고 드레싱을 받고 가라며 있을 수 있으면 4일도 상관없다고 했다.


이틀이 지나자 아버지는 내게 "손을 움직일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고는 그렇다는 대답에 "그럼 의사에게 퇴원시켜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속히 퇴원해서 오리를 마저 키우라"고하셨다. 당시 농장은 비어있는 것도 아니었고 삼촌이 대신 봐주시고 계셨는데, 하루라도 빨리 복귀해서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시는 아버지가 (손가락 수술은 받아보신 적이나 있으시던가) 야속했다.


난 생에 첫 (아니 두 번째) 수술이어서 나름 좀 애처롭고, '아 이런 게 바로 노동의 고초구나' 삶의 고단함을 철학적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당시 같은 병실의 4인의 아저씨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다쳤는데 하루라도 더 있으려고 다.) 아버지는 삶의 고초를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해 주셨다.


결국 그날 바로 퇴원을 했고, 다시 농장으로 복귀했으며 다시 이틀 뒤에 실밥 제거와 드레싱을 위해 대전을 또 다녀왔어야 했다. 왕방울 만하게 엄지손가락에 달려있던 붕대와 손가락 지지대는 일하는데 여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가스와 톱밥, 각종 미세먼지와 축분의 냄새 등이 가득한 축사라는 환경에서, 늘 샤워를 달고 살아야 하는 축산인에게 수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불편을 줄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게 해 주었다.


손가락 상처보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노동의 무서움을 느낀 게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게 세상살이구나.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버지는 우리를 키워냈구나. 그래서 그동안, 몇십 년 동안 남들 다 가는 2-3일 여름휴가 한번 없이, 가끔은 빨간 날도 저 양반은 출근을 했던 거구나.




지금은 아버지가 여름휴가를 꼬박꼬박 챙겨가신다. 그래도 여름휴가라는 것을 경험해보고 은퇴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다만 어딘가 여행도 가지 못하는 요즘 연휴 같은 경우에는 매우, 무척, 아주, 답답해하신다. 그럴 땐 차라리 독서를 하세요.


생각해보니 몸을 쓰는 직업은 몸에 나는 상처만 신경 쓰면 되는데,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은 매일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지는 않을까? 그런 사람들도 그런 상처들에 익숙해질까? 너무 서글프다. 사람에게 상처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감정 노동자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몸에 생긴 얕은 상처도 언제, 왜 그랬느냐에 따라 강한 기억이 남기도 한다. 또 녹이 슨 기구에 다칠 때면 파상풍 같은 질병도 걱정해야 한다. 감정은 어떨까. 마음의 상처도 그렇지 않을까? 상대의 사소한 언행도 끔찍한 기억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우울증이나 자괴감 같은 치명적인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감정 노동자뿐만이 아니다. 부모님이배우자에게, 형제나 자매에게, 홧김에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거친 말들이 어떤 생채기를 내었을까.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세월이라는 약 만으로 쉽게 아물었을까.




<연필 하나로 가슴 뛰는 세계를 만나다. 2014. 북하우스>를 읽어보면 이 책의 저자이자 제3세계 교육기관 설립 비영리재단인 "약속의 연필 (Pencils of Promise)"의 설립자 애덤 브라운이 어린 시절 친구들과 파티에 갈 때마다, 집을 떠나 여행과 모험을 떠날 때마다 아버지께서 항상 해주신 말씀은 "아빠의 원칙을 명심해라"였다고 한다.


아빠의 원칙이란 "아빠가 보고 있다면 하지 않을 짓은 하지 말 것, 아빠가 내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처신할 것." (P.22)이다.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하고 메모해 두었다. 더불어  아이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특히 SNS 게시물 올릴 때 라던지 말이다.


<이명학 교수의 어른이 되어 처음 만나는 한자. 이명학 저. 2020. 김영사>에 보면 "배려"(짝, 나눌 配 생각할 慮) 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라고 한다. 그리고 '배를 려한다 (상대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려를 배 한다 (생각(마음)을 나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배려는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P.37)


누군가에게 상처를 가장 적게 주는 방법은 말과 행동을 함에 있어 상대를 배려하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배려는 상대를 생각해주는, 나에게 있는 긍휼히 여김을 "기부"하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을 전해주는 것.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전해주는 것. 상대방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하나뿐인 내 마음을 상대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주변에 가까운 누군가 관계에서, 일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 따뜻한 마음의 밴드를 붙여주는 건 어떨까.


우리 둘째 처럼,  굳이 약 없이도 그저 엄마 아빠가 호호 불어 붙여만 주면 다 괜찮아지는 마법의 밴드는 바로 내 아픔을 알아주고 공감해 주는 그 마음의 밴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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