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새로 옮긴 유치원은 "언어 전달장"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보통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알림장이 "선생님이 부모에게 아이들의 하루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면서 아직 자신의 하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둔 부모의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해소해 준다면, 언어 전달장은 "부모가 아이에게 오늘 유치원에서 뭐했는지 물어보고 그 소감을 들은 대로 적어서 선생님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다.
전달장의 맨 윗줄에는 "부모님들은 어린이가 전달한 그대로 적어주세요."라는 안내문이 적혀있는데, 유치원의 특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아이들의 어휘력 증진 및 논리적인 말하기 훈련을 위한 제도인 듯하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고 그래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말하는 훈련은 아주 좋은 것이기는 하나, 이 언어 전달장은 부모에게 아주 커다란 "숙제"이다.
"딸, 오늘 유치원 어땠어?" "오늘은 무슨 재밌는 일이 있었어?" "오늘은 어떤 친구랑 놀았어?" 등 질문을 쏟아내면 아이는 퉁명스럽게 "까먹었어" (너 방금 유치원에서 나왔거든.) "비밀이야." (별게 다 비밀이다.) "왜 내 비밀을 자꾸 알려고 해?" (대단한 비밀 나셨다.) 등의 말을 하면서 대답을 회피하는 데다가 원래 이 아이는 성격상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어휘력이 이상한 쪽으로 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너무 힘이 들어서 "들은 그대로" 아이가 오늘 칭찬을 받아서 좋았다면서도 왜 칭찬을 받았는지는 비밀이라면서 통 이야기를 안 해줍니다.라고 써서 보냈다. 다음날 선생님이 코멘트를 달아주셨는데, 아이들은 커갈수록 비밀이 많아진답니다 ㅎㅎ라고 쓰여있었다. (이 아이는 이제 겨우 7살이라고요.) 뭐지? 그걸 알면서 시킨단 말이야??
"아이에게 묻기 전에 먼저 나의 일상을 이야기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하루를 물어보라"는 어머니의 조언을 듣고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며칠 만에 이게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는 매일 독서실에서 공부를, 나는 매일 집에서 독서, 글쓰기, 자료 연구, 티(tea) 공부를 하는 반복적인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는 거의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똑같이 한다. 이런 일상을 아이에게 무엇인가 끄집어내기 위해서 매일 "색다르게" 이야기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아, 그래서 첫째도 제대로 대답을 안 했나?' 첫째 녀석 입장에서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등원하고 똑같은 수업하고 똑같은 애들하고 놀고 똑같은 선생님 보고 (코로나로 외부 선생님들이 못 오기 때문에 더 단순해진 생활이다)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가 귀찮을 수도 있겠구나 싶기는 했다.
일상에서 아주 사소하고 작은 변화도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으로 생각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반복되는 일상 같아도 오랜만에 받은 친한 친구의 카톡이나 전화도, 부모님과의 통화도, 아이들과 산책을 간 것도, 어제는 눈이 내린 것도, 오늘은 안개가 많이 낀 것도, 아내와 아이를 데려다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단둘이 30분 동안 드라이브를 한 것 등등. 생각해보면 작고 사소한 특별함은 매일매일 있다.
문득 2019년에 갔었던 스페인 작가 "에바 알머슨" 전시회가 생각났다. 원래 일상의 행복을 그리기로 유명한 작가라고 하는데 전시회에 가서 보기 전까지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대표작을 보니 여기저기서 많이 보던 작품들도 있었다. 전시 주제 중 하나도 "특별함은 매일매일에 있다"였다. 전시관에 들어서면서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설정해둔 그 문장은 지금도 내 카톡 알림말 이자, 내 브런치 작가 소개에도 적용된 글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이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서로 곱씹으며 하루 종일 미소 짓는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매일매일의 일상. 내 삶의 하루하루가 특별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하고 소중한, 아주 작고 사소한 행복.
흔히 "평범하게 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다 다큐고 인생극장처럼 굴곡진 삶이다. 과연 평범은 무엇인가. 표준국어 대사전에는 "평범하다"에 대해서 "특별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고 되어있다.
그럼 "보통"은 무엇인가. "특별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음.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라고 한다.
단언컨대 나는 나랑 똑같은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을 산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흔한 인생이란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거밖에 안돼." 흔한 절망과, "내 인생은 그저 평범해." 흔한 단정, "난 평범한 사람일 뿐인걸." 흔한 열등감뿐.
오늘은 주문해 놓고 잊고 지내던 해외구매대행 연필이 와서 특별한 날이다. 미국 아마존에서 구매 대행자, 구매 대행자에서 공항, 공항에서 택배 허브, 택배 허브에서 우리 집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왔을까.
내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소중함을 잘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 그저 지나가는 우리 아이에게 "마스크를 잘 쓰는구나" 칭찬해주시던 이름 모를 아주머니, 택배사나 우체국 직원 등. 이번 폭설에도 어김없이 이틀 안에 로켓 배송은 오지 않던가.
늘 내게 미소 지어주는 우리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미소 짓게 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선생님들, 친구들..... 모두가 우리의 일상을 매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기분 좋게 미소 지을 수 있다.
일상 속의 작은 특별함을 경험해보자. 사소하고 작은 행복을 누리는 훈련을 해보자. 평범한 하루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어보자.
그저 "안녕하세요, " "수고 많으시네요, " "고맙습니다." 한마디라도 전해보자.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따뜻한 미소 지어보자. 어쩌면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오늘이 특별한 일상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방법은 이렇다.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아 배고파."
"오늘 간식은 OO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거였나?"
"둥 따따 쿵 따쿵."
"오늘은 북 치는 거 배웠구나?"
"친구들,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자 따라 해 보세요."
"오늘은 그 표현을 배웠구나?"
그저 가만히 아이를 지켜보면서 아이가 혼잣말, 또는 소꿉놀이할 때 표현하는 아이의 "일상"을 들어보는 것. 아주 짧은 찰나에 지나가거나, 아주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것. 아주 평범한듯한 아이들 놀이 속에서 특별한 표현을 찾아내는 것.
언어 전달장은 아이의 어휘력 훈련이 아니라, 부모의 소통 훈련이자, 일상의 고마움과 특별함을 발견하는 숙제이고 훈련이고 기회다. 아이의 대단한 비밀을 여는 열쇠는 "관심"이다. 그리고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