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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Feb 24. 2021

나를 규정짓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이불 킥.


소심하고 내성적이라고 불리던 나는 이불 킥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말할걸, ' '그러지 말걸, ' '괜히 그런 말을 했나?' 등등. 이불 킥을 하는 이유도 상황도 다양하다. 어릴 때는 정말 심했다. 하루 걸러 하루가 이불 킥이었을 정도로. 그래서 숙면을 못해서 키가 안 컸나?




여섯 살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빠른 년생인 나는 대전이라는 도시에 제대로 적응할 새 없이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처음에는 동네 유치원에 갔다가 반년만에 지인이 운영하신다는 선교원으로 전학을 갔다. 서울에서 온 깍쟁이 소년은 유치원에서도, 선교원에서도 제대로 친구 사귈 겨를도 없이 국민학생이 되었다. 지금도 지나가다 보면 꽤 큰 그 초등학교는 내가 2학년에 전학을 가기 전까지 오전반 오후반으로 2부제를 했다.


존재감 없는 아이.

내가 생각했던 내 어릴 적 모습이다. 소극적이고, 운동도 잘 못하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참 소심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슬퍼서 울은 건 아니고 귀찮아서 울었다. 나는 진짜 친한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냥 같은 반 아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애들이 놀릴 때면 그냥 울었다. 그냥 맞받아치기도 뭣하고 딱히 싸우고 싶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계속 놀려대니 그냥 울었다.


착하고 순한 대전 아이들은 그런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심하게 놀리고 괴롭힐 수 있었는데, 참 착한 아이들이었다. 오히려 자꾸 운다고 지켜주는 애들도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고, 길에서 마주친 동창들도 먼저 아는척하지 않으면 그냥 모른 체 지나치기도 했다. 어차피 나라는 아이는 모를 거라고 생각했고,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다 잊고 새 출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고등학생까지 쭉 그 동네에 살았고, 학교도 고등학교까지 쭉 그 동네에 위치한 학교들을 나왔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살아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대부분 아이들이 같이 진학을 했어도 매년 베스트 프렌드는 바뀌었다. 매번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오래갈 것 같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어린 우정은 학년, 반만 바뀌어도 쉽게 바뀌었다.


내가 대전에 와서 처음에 다녔던 동네 유치원, 그 동네 2부제 국민학교, 전학 온 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쭉 같은 학교를 다닌 아이가 있었다. 어떻게 아냐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같은 반을 해보았다. 당연히, 안 친하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저랬던 사실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렇게 매 번 마주하는 그 아이와 끝내 친구가 되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다. 그 모든 게 내가 소극적이고 소심해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며 그냥 친구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대학은 고등학교 졸업식도 못하고 1월에 미국에 가서 어학연수부터 학부 졸업까지 5년을 다니고 돌아온 고향에 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귀국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동네 이마트에서 동창을 만났다. 그 아이는 나를 먼저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얼굴이 그대로라고 했다. 6학년에 딱 한번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는 내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이제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어차피 곧 입대를 해야 하니 또 누군가를 굳이 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그렇게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그 해 연말, 그 친구는 자기가 아직 연락이 되는 동창들을 모두 불렀고 나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남자 셋, 여자 셋. 그리고 모두 나를 알아보면서도, 소심쟁이 울보 녀석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별 기억이 없었다. 다들 십수 년이 지나며 이름과 얼굴, 대단했던 특징만 기억할 뿐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기억 못 할 것을, '나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아이야'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수십 년이 후회되었다.




그 모임을 계기로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소심하다던 어린 초등학생은, 한 기독교방송국 어린이 합창단에 오디션을 보고 입단해서 2년을 대전 곳곳의 교회들과 해외 교회들, 그리고 대공연장에서 매년 정기연주회까지 수십수백 번 무대에 섰었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걱정했던 삼촌의 권유로 중학생 때 드럼을 배웠다. 소심하다던 그 고등학생은 진학하자마자 친구들을 모아 밴드를 결성하고,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까지 하면서 드럼을 치고 다녔고, 수십 번 공연장에 섰다.


고2 말에 열렸던 학교 축제에서는 내가 만든 밴드 리더로 한번, 동아리로 한번, 학교 오케스트라의 교가 연주에 한번, 연극부 아이들 도와준다고 한번, 혼자 4번이나 무대에 올랐었다.


대학에서는 한인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학교 학생회 산하 한인 학생회장을 하고, 축구도 잘 못하면서 학교 실내 풋살리그 주장을 3년이나 했다. 이유는 한국 학생들은 보통 동양인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경기에 참가했는데 한국인이 절대다수였던 우리 팀의 주장은 한국말과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면서 그 리그에 출전할 만큼 축구에 열성적인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자, 다른 한국 학생들 아무도 안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미국인 교회에서 드럼을 치고, 히스패닉계 미국인 친구들과 밴드를 하고, 드럼 레슨을 하고 또 드럼 레슨을 받았다.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만나며 우정을 다지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교가 아닌 대전에서 처음 다녔던 교회에서 만나 친구들이다. 나를 빼고는 이제 아무도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교회가 맺어준 친구들은 중간중간 누군가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고 누구는 군대를 누구는 공익을 누구는 유학을 갔어도 기어이 서로를 찾아내 연락을 하고 만나며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진짜 소심한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들을 해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내 삶은 더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회사에서 인턴을 할 때는 동료들이 나의 장점을 '어디서나 당당한 자세'라고 꼽았었다. 물론 사장님 아들이니까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그 이후의 대부분의 활동에서도 같은 평가를 받았다.


나를 소심한 사람으로 규정짓는 건 내 생각, 부모님과 친척들의 말 뿐이었다. 내 모든 발자취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는데 나 혼자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라는 굴레에 갇혀서 내가 해온 일들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해왔던 활동들이 내 성격을 바꾸었을까 아니면 원래 내 안에 있던 외향적인 면이 잘 발산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던 걸까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아무도 날 소심하다거나 내성적이라고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너는 소심한 게 아니고 예민했던 거네."




지금 살고 있는 충북에서 누군가를 사귀고 친해질 때마다 습관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제가 낯을 좀 가려서요."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 대학생 때부터 내가 어디 가서 낯을 가린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가렸지 낯을 가리고 숫기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냥 예민하니 나랑 맞지 않거나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가렸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출신과 배경, 그리고 경력에 대한 소문과 오해가 불어나면서 예민함은 까칠함이, 낯섦은 도도함이, 부끄러움은 때로는 건방짐으로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면서 갑자기 늘어난 인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친구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OO야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을 수는 없어. 너도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올 거야."


당시 나는 여러 명에게서 오는 문자들과 연락들에 대한 즐거움에 취해있었고 누나에게 배운 대로 모든 여자들에게 친절하고 매너 있게 대했다. (정작 누나가 원했던 누나랑 어머니한테는 말고 말이다.) 나는 고맙고 기쁘고 인정받는 게 좋아서 그랬는데 뒤에서는 느끼하고 바람둥이에 어장관리남이 되어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아닌 타인들이 멋대로 나를 규정지어버리고는 자신들 마음대로 나를 대했다. 결국 잊히고 마는 관계들 속에서 오해로만 남고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사람이란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정당하고 온당한 일을 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상처 받고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종종 '그러다가 미움이라도 받으면 억울하지 않냐'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예수님도 안티가 있고 유재석, 강호동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이유 없는 미움은 질투로부터 비롯될 때도 많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겸손함을 강요받다시피 배웠다. 넘사벽이라면 모를까 어설프게 남들보다 나은 형편은 질투를 부르고 욕을 먹기 좋았다.


IMF로 모두가 힘들었던 중학교 2학년 때 친했던 친구가 이유 없이 멀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 아버지는 실직하셨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고 그 친구를 동정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고 했다. 난 그 친구 사정이 그런 줄도 몰랐고 동정하지도 않았다. 나의 아버지도 거의 1년간 월급을 제대로 받아오지도 못하셨다고 들었다.


2011년 전역할 때 부모님께서 "10년"타라며 그랜져를 선물로 주셨다. 누군가는 '겨우 그랜져라니 소탈하다'며 칭찬을, 누군가는 '그랜져라니 꼴값이다' 거나 '엄마 차를 제 차인 양 타고 다닌다'며 손가락질했다. 나는 그 차를 굉장히 사랑했고, 농장을 하며 픽업트럭을 구매한 뒤로는 명의를 아내로 옮겨 아직도 잘 타고 있다. 정말 10년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면허도 없으시다.


사람들은 내 상황, 진실 따위는 관심도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자기가 받아들인 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내뱉는다. 그로 인해 내가 받는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 나도 상처 받을 필요 없다. 다만 부당한 일을 하고도 뻔뻔하지 않다면 말이다.




주눅 들 필요 없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내 꿈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정의롭지는 않더라도, 온당한 일이라면 당당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어차피 끝까지 나를 제멋대로 판단하고 대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결국 진정성을 알아봐 주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두고 굉장히 '인복'이 많은 아이라며 행복해하신다. 확실히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도움도 많이 받았고 누군가에게 크게 모진 말을 들어본 적도 거의 없다. 사실 '인복'은 타고난다기보다는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모님께로부터 타인을 대하는 법을 배운 대로,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대로, 내가 받고자 하는 대로 남들을 먼저 대하는 대로,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그 사람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관계를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대로, 그 사람도 나를 대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나라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정의하는가는 내 인생을 어떻게 계획하는가 와도 연관이 있다.


아내가 말했다.


"자기도 작년 그리고 올해 너무 힘들었지, 우리 진짜 내년에는 좋아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여보 나는 작년 그리고 지금 최고로 행복해. 농장도 적기에 팔아서 지금 이 난리인 조류독감에 걱정 안 해도 되지. 갭이어로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지. 자기 공부할 동안 애들 보면서 애들이랑 친해지고 있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요즘이 가장 행복해."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 반백수인데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신나냐고. 하지만 그럼에도 감사할 거리는 많다. 남들이 나를 보는 대로 나를 보지 않고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마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아주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기대하고 있다. 내 꿈을 펼치고 비상하는 그때를. 반드시 돌아올 그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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