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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e Lee Apr 05. 2022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작년 가을 즈음부터 오른쪽 눈이 왕왕 따끔거리고 욱신거린다. 아무래도  안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좁은 공간 안에서 가까운 것만 보고 살아서 그런건 아닌가 싶어서 아침부터 틀어놓았던 대선개표방송이 흘러나오는 노트북을 들고 창가로 갔다. 가까운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눈이 반짝 뜨여지는 느낌이 든다. 멍하니 뿌연 산을 바라보다가  아래 우리  아파트 왼쪽으로 흐르는 내천의 반짝이는 물결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골목에서 연식이 가장 오래된 30년도 훌쩍 넘은  낡은 아파트의 6층에 있는 우리집이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강이 보이는 '였던가. 햇살에 비쳐 반짝이며 자연스레 물결을 따라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보노라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낀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행복의 파랑새는  안에 있다는  이런건가.



 그러다가 불현듯 스쳐지나가듯이 생각나는 게 있다. 20대 시절, 초보 취준생이 되면서 자기소개서를 쓰게 됐는데 필수항목에 좌우명이 있었다. 변변한 사회 경험 하나 없고, 인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깊이 고뇌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인생의 신념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 그럴듯한 말로 남을 설득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계기로 나는 어떤 삶을 어떻게 살기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살자


 그 때의 나도 물을 좋아했나보다. 자연스러움에서 물을 연상한 걸 보면. 이십대의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한 단계 발전한 나를 만나기 위해 노력해왔고 또 노력할 의지가 있었다. 나에게는 과외 한 번 안 시켜주셨던 엄마가 오빠에게는 중앙대 의대생의 과외, 매일 5천원의 간식비 등 퍼붓듯이 쏟아냈던 학업 뒷바라지의 차별대우를 견디며 꿋꿋하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학과가 가장 잘 어울릴까 고민하며 '유아교육'이라는 학문의 길로 들어섰고 그 이후, 관련 진로를 소신있게 선택해 나갔다. 눈에 띄게 잘하는 게 뭔지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던 나는 상황에 따라 피아노 치는 재능이 필요하면 몇 시간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했고, 국제 컨퍼런스를 참여하면서 영어 말하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 후, 유아교육에 영어라는 재주가 붙어 말레이시아에 있는 난민학교에서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적으로 유아영어교육의 전선에서 일할 수 있는 취업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오면서 내가 이렇게 정성들여 차곡차곡 쌓아왔던 재능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언어에 대한 자신감도 '일본어' 앞에 처참히 무너졌다. 일본이라는 타국에 적응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심플함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단어가 변해도 너무 변하고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이 언어를 도저히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실력들로 인정받아온 삶을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이 허허벌판같은 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마치 무참히 밟힌 잔디풀처럼 무명의 서러움 속에서 나를 알리고 싶고, 살아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내 안에 있었지만 굳이 찾아 쓸 필요가 없었던 감추어진 재능들을 하나씩 내 쓰게 되었다.  주로 쓰던 오른손이 다치면 왼손을 쓰게 되듯이 말이다.



 첫번째 시작은 핸드메이드이다. 일본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측은히 여긴 남편이 재봉틀 하나를 사 주었다. 모든 것이 100엔에 파는 일명 100엔 샵의 핸드메이드 코너를 서성이며 재료들을 구입하고 간단한 리본핀을 만들어 첫째 딸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5분만에 만들어진 예쁜 리본핀은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핸드메이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서 순간적인 환호와 인정의 말을 듣게 해주었다. 그러나 칭찬에 바짝 메말라 버린 내 마음 속 호수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물 한모금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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