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불현듯 스쳐지나가듯이 생각나는 게 있다. 20대 시절, 초보 취준생이 되면서 자기소개서를 쓰게 됐는데 필수항목에 좌우명이 있었다. 변변한 사회 경험 하나 없고, 인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깊이 고뇌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인생의 신념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 그럴듯한 말로 남을 설득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계기로 나는 어떤 삶을 어떻게 살기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살자
그 때의 나도 물을 좋아했나보다. 자연스러움에서 물을 연상한 걸 보면. 이십대의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한 단계 발전한 나를 만나기 위해 노력해왔고 또 노력할 의지가 있었다. 나에게는 과외 한 번 안 시켜주셨던 엄마가 오빠에게는 중앙대 의대생의 과외, 매일 5천원의 간식비 등 퍼붓듯이 쏟아냈던 학업 뒷바라지의 차별대우를 견디며 꿋꿋하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학과가 가장 잘 어울릴까 고민하며 '유아교육'이라는 학문의 길로 들어섰고 그 이후, 관련 진로를 소신있게 선택해 나갔다. 눈에 띄게 잘하는 게 뭔지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던 나는 상황에 따라 피아노 치는 재능이 필요하면 몇 시간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했고, 국제 컨퍼런스를 참여하면서 영어 말하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 후, 유아교육에 영어라는 재주가 붙어 말레이시아에 있는 난민학교에서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적으로 유아영어교육의 전선에서 일할 수 있는 취업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오면서 내가 이렇게 정성들여 차곡차곡 쌓아왔던 재능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언어에 대한 자신감도 '일본어' 앞에 처참히 무너졌다. 일본이라는 타국에 적응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심플함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단어가 변해도 너무 변하고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이 언어를 도저히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실력들로 인정받아온 삶을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이 허허벌판같은 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마치 무참히 밟힌 잔디풀처럼 무명의 서러움 속에서 나를 알리고 싶고, 살아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내 안에 있었지만 굳이 찾아 쓸 필요가 없었던 감추어진 재능들을 하나씩 꺼내 쓰게 되었다. 주로 쓰던 오른손이 다치면 왼손을 쓰게 되듯이 말이다.
첫번째 시작은 핸드메이드이다. 일본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측은히 여긴 남편이 재봉틀 하나를 사 주었다. 모든 것이 100엔에 파는 일명 100엔 샵의 핸드메이드 코너를 서성이며 재료들을 구입하고 간단한 리본핀을 만들어 첫째 딸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5분만에 만들어진 예쁜 리본핀은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핸드메이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서 순간적인 환호와 인정의 말을 듣게 해주었다. 그러나 칭찬에 바짝 메말라 버린 내 마음 속 호수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물 한모금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