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
우리는 2018년 가을 한국에서 만났다. 노원구의 모 대학교에서 소주 맛 교환 학기를 보내고 있던 스테펜과 마포구의 한 사무실에서 말라가고 있던 내가 서로를 알아본 것은 강남역 11번 출구 앞이었다.
2018년, 1년 차 꼬꼬마 직장인이었던 나는 꾸준히 방콕, 홍콩, 싱가포르 등에 이력서를 뿌렸다. 해외 취업은 내 오랜 꿈이었다. 불문학을 전공했기에 이력서에 “일상 회화 수준의 프랑스어 구사”라고 조심스레 적어놓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졸업 후 등한시한 불어는 순식간에 전부 잊혔다. (원래 뭔가를 전공하면 그렇게 되지 않나.)
스스로의 이력서에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어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틴더를 다운로드한 건 그래서다. 틴더는 상호 간 좋아요를 기반으로 근처의 다른 유저들과 1:1 매칭을 해 주는 플랫폼인데 당시만 해도 거의 외국인만이 사용했다. 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프랑스인들에게 좋아요를 날렸다.
매칭은 줄곧 되었는데 이상하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프랑스어와 한국어 간 언어 교환을 하고 싶다고 프로필에 적어 두었는데, 그보단 플러팅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셀피를 더 보내 달라든지, 목소리를 듣고 싶으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든지 하는 식으로. 물론 친절한 이들도 있었지만 공통된 관심사가 없어서인지 대화는 툭툭 끊겼다.
그러다 스테펜이 내 스크린에 등장한 거다. 우린 이상하리만치 잘 통했다. 스테펜은 친구들과 스타트업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과거 창업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산다는 내 말을 듣고 그는 예전에 키우던 래브라도의 사진을 보내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노르망디의 여행지인 몽생미셸 근처에 살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다고도 했다. 서울에서 교환 학기를 보내며 한국어를 배우던 스테펜에게 한국어 표현들을 가르쳐주고, 잊고 있던 프랑스어로 인사를 나누며 며칠간 대화를 이어갔다.
함께 저녁을 먹자는 제안을 한 건 스테펜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스테펜에게 이성적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틴더 프로필에는 나이가 표시된다. 스테펜이 적어 놓은 자기 나이는 21. 난 그게 만 나이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한국 나이로 26살이었고 친남동생보다도 한참 어린 스테펜이 그저 풋내 나는 어린애라고 생각했다. 잭 블랙을 닮은 통통한 얼라. 솔직히 싸움이 붙어도 내가 이길 것 같았다. 두려울 것 없던 나는 호기롭게 스테펜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강남역 11번 출구를 약속 장소로 정했다.
불금의 저녁, 북적이는 강남역 11번 출구. 미리 도착한 스테펜은 망했다 싶었다고 했다. 마침 핸드폰 데이터가 똑 떨어져 나에게 메시지도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 중 도저히 날 찾을 자신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난 바로 스테펜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애는 핑크색 후드티를 입고 초조한 표정으로 출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출구를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뚫어져라 관찰하면서. '핑크색이 잘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좀 귀엽네.' 싶었다. 그때는 몰랐지. 우리가 이렇게 찐한 사이가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