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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May 31. 2021

우리는 우리를 가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사실 팍스(PACS) 뭐 별건가 싶었다. 결혼식처럼 거창한 세리머니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서약의 반지를 나눠 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청에 가서 준비된 서류에 서명을 하면 3분이면 맺어지는 관계. 하지만 그 임팩트는 생각보다 컸다. 우리가 하나의 가족을 만들었다는 걸 매일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우선 팍스 후 나의 신분(?)이 달라졌다. 여기선 유난히 어떤 공적 서류를 작성할 때 나의 가족 상태(état civil)를 묻는 일이 많다. 입국 신청서를 쓰거나, 은행 계좌를 열거나, 심지어는 마트 멤버십 가입을 할 때에도. 선택지는 주로 미혼(celibataire), 기혼(marié), 팍스(pacsé), 이혼(divorcé), 사별(veuf) 등으로 나뉘는데


바로 이렇게!


그중 '미혼'을 두고 '팍스'를 선택하는 일이 낯설고 신기하면서 조금 재밌기도 하다.


호칭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리야 예나 지금이나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제삼자에게 서로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뀌었다. 예전엔 "제 여자친구에요." 였다면 지금은 "제 팍스 파트너(partenaire)에요."라고 말한다. 처음 스테펜이 나를 '여자친구'라고 표현했을 때 우리가 로맨틱한 관계가 되었음을 실감했던 것처럼, '파트너'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나의 팀이 되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팍스와 관련된 프랑스의 다양한 제도들도 그렇다. 우리는 이제 출산 후 공동 친권을 행사할 수 있고, 세금도 함께 내며, 서로의 부채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진다. 또 팍스 후 스테펜은 자신의 사망 보험금 수령인을 나로 변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어떤 공동체가 된 거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가족을 이뤘다는 걸 가장 깊이 실감하게 만드는 건 이 장면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 발 밑엔 고양이들이 몸을 돌돌 만 채로, 고개를 돌리면 오른쪽엔 스테펜이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존재들. 내가 선택한 이들이 이제 내 가족이고 내가 언제든 돌아올 집인 거다.


국어사전은 가족을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 설명한다. 우리 둘과 고양이들은 그 정의에 부합되는 집단은 아니다. 우리는 부부도 아니고 고양이들은 사람이 아니니. 하지만 프랑스 위키피디아는 가족을 '한 지붕 아래 거주하는 개인 혹은 커플과 그들의 자식(une personne ou un couple et leurs enfants vivant sous le même toit)'이라 말한다. 그건 우리가 맞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가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현관문 앞에 우리 둘의 성을 따라 'Leroy-Ohn'이라는 문패를 달기로 했다. 우리가 모두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안건이 생길 때마다 가족회의도 열고 있다. 지난 회의에서는 '신규 세탁기(모델명: LG F74N23WHS) 구매의 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가족을 만드는 게 이렇게 재밌고 행복한 일일 줄 몰랐다. 지레 겁먹고 피하려고만 했었는데. 그렇다고 과거의 나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냥 지금을 누리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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