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자와 한국 고양이들의 합사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양이들과 스테펜의 합사는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하지만 오직 시간만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스테펜은 타인의 감정을 결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다.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의 성격 차이가 여기에서 드러나는데, 간단히 MBTI로 설명하자면 나는 INTJ, 스테펜은 ENFP다.
나는 느끼는 감정의 폭이 좁다. 신파극을 봐도 10만큼 슬퍼하고, 행복한 순간에도 10만큼 행복해한다. 그래서인지 스스로의 감정을 신경 써 다루지 않는 편이다. 결정을 내릴 때도 이성에 의존하려 한다. 이런 나의 큰 단점 중 하나는 감정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 난 상심에 빠져 우울해하는 친구를 잘 위로하지 못한다. 속으로 '왜 저러지?' 하며 상투적인 '힘 내'만 반복하는 '힘 내 기계'다.
스테펜은 다르다. 감정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그는 슬플 때 50만큼 슬퍼하고 행복할 때 50만큼 행복해한다. 매 순간 인텐스한 감정을 느껴서인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에 집중하는 편이다. 삶의 목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해지는 것. 그런 그는 주변 사람의 슬픔과 우울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스테펜은 고양이들과 나의 예민함을 온전히 이해했다.
"넌 왜 그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아?", "고양이들은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싫어해?" 하는 무심한 말들로 내 화를 돋우지 않았고, 천천히 다가가 달라는 나의 조언을 무시하고 숨어있는 고양이들을 찾아내 냅다 장난감을 흔들지도 않았다.
스테펜은 심바가 싫어하니까 불편해도 소파에는 앉지 않았고, 라떼가 무서워하니까 매 순간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와 고양이들이 셋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혼자 작은 방에 가 있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나와 고양이들의 마음을 먼저 살폈다. 자신으로 인해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무던히 애썼다.
그리고 고양이들은 그런 스테펜의 배려에 천천히 마음을 열었다.
심바는 (비록 조금 언짢아 보이지만) 마침내 스테펜과 소파를 공유하겠다 마음먹었고,
(라떼와 친해지는 데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엔 라떼도 더는 스테펜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
어느 날 아침, 간밤에 라떼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골골송을 불러줬다며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날 깨우던 스테펜의 얼굴을 기억한다. 고양이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형아가 나 엄청 맛있는 거 줬어!", "형아가 오늘 나랑 30분이나 놀아주고 궁디팡팡도 해 줬어!" 나에게 재잘재잘 떠들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한강 근처의 작은 투룸에서 한국 여자, 프랑스 남자, 한국 고양이 두 마리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역사가 시작됐다.
(비록 펀딩은 끝났지만, 내가 참여한 <이웃가족 이야기> 프로젝트를 뒤늦게나마 소개한다.)
https://tumblbug.com/thestoryofneighborh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