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로제타석
LA와 한인타운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10월 9일은 한글날 (Hangul Day)이다. 2019년에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법안은 한인사회의 힘과 노력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이민 온 한국인들은 세탁소, 주유소, 편의점 등으로 삶을 개척했다 [1]. 언어도 다르고 사회 전반의 시스템도 다른 이곳에서 이들은 누구보다 악착같이 버티면서 아들과 딸의 성공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한국사람, 한국의 엄마 아빠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1992년 LA 폭동 당시 미국은 한인타운을 버렸다. 마치 삼팔선을 긋듯이 백인 동네 언저리에서 지켜만 보는 경찰들. 그 폭동은 흑인과 백인간의 충돌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애꿎은 한인타운만 폭동의 혼란을 틈타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들의 타깃이 되었던 것이다 [2]. 이때 나온 말이 “지붕 위의 한국인들 (Rooftop Koreans).” 대부분이 군필인 한국 아저씨들은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들었고 바로 소규모 군대조직을 구성해 동네 사수에 들어간다. 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높은 고지 (지붕)를 점령한다. 소문은 바로 퍼졌고 폭동들에게 한인타운은 더 이상 만만한 타깃이 아니었다 – 아니 약탈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한인사회는 각성을 하게 된다. 돈을 악착같이 벌어서 내 가족만 잘 살면 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소수민족이지만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한인의 힘과 영향력이 커져야 함을 인지한다. 그 후로 캘리포니아의 정치, 문화, 사회에 더 많은 한국인들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정치인을 선출하고 한국인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을 후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탄생한 것이 한글날이다. 이제는 한국 사위 주지사 래리 호건이 있는 메릴랜드 주에서도 한글날 지정을 진행하고 있다.
28년이 지난 올해 한국계 미 하원의원이 4명이나 선출되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한국의 영향력이, 한글의 영향력이 미국 전반으로 더 확대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한글은 대단하다. 일단 언어학적으로 가장 진화된 표음 문자(소리글자)이자 음소 문자(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자음이나 모음)이다. 표어문자인 한자와 표음 문자이지만 음절 문자인 일본 글자의 한계점들과 비교해 보면 그 유용성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질 문자(featural writing system)로서의 과학성, 독창성, 가독성, 습득성 등은 물론이지만 일단 모듈 디자인 (구성요소를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디자인) 개념은 봐도 봐도 감탄스럽다.
모듈 디자인의 한글의 모음은 점/수직선/수평선의 단 3개의 버튼으로 21개의 모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천지인 자판). 획 추가와 쌍자음의 기능을 사용하면 6개의 버튼 (ㄱ, ㄴ, ㄹ, ㅁ, ㅅ, ㅇ)으로 19개의 자음도 표기할 수 있다(나랏글 자판). 영어의 경우 40여 개의 자음 모음을 표현하려면 26개의 독립적인 버튼 (알파벳 전부)이 필요하다. 더 줄일 수 있지만 도저히 불편해서 쓰지 못한다. 체계성이 돋보이는 모듈 디자인의 승리다.
조합 방식도 기발하다. 라틴알파벳과 같은 다른 음소 문자가 글자들을 일차원의 선으로 나열하는 방식이라면 한글은 이차원의 그리드에 음절단위로 조합하는 방식이다. 소리의 단위를 초성, 중성, 받침을 사용해서 소리 형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조합방식은 우아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 배우기도 쉽고 라틴알파벳처럼 따로 발음기호도 필요 없다. 한글 자체가 발음기호이고 누가 읽어도 똑같은 소리로 발음한다.
끝으로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봤을 때 조형적으로 뛰어나다. 상형문자에 기원을 둔 다른 문자와는 달리 군더더기 없고 효율적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쉽게 표현한다라는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정제에 정제를 거듭해서 기름기 없는 가장 순수한 조형 '진액'을 보는 듯하다. '가장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의 미니멀리즘과 '형태는 기능[소리]을 따른다'의 모더니즘 디자인의 철학을 기가 막히게 융합했다. 거기서 한글의 세련미와 가독성이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7,000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하는데 그 대부분이 라틴, 키릴, 아랍, 한자 문자 체계를 쓴다. 그중 첫 번째 세 개는 그 기원이 이집트 상형문자이고 한자는 알다시피 갑골 문자에 뿌리를 두었다. 그 문자들은 다양한 언어와 만나면서 모양, 소리, 뜻이 모두 분리되어 현재의 문자 체계로 발전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른 길을 택했다. 한자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일본처럼 이를 변형하기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문자 체계를 발명한 것이다. 그것도 한 명의 임금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혁신이다.
만약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 제국, 2세기의 로마제국, 8세기의 아랍제국, 혹은 12세기 몽골제국에서 한글이 발명되었다면 지금의 세계 문자 체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글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글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문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장점과 가능성들을 가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위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더욱 적극적으로 한글을 혁신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언어학자도, 한글 전문가도 아닌 일개 한국인의 생각이다.
우선 한국어와 한글을 동일시하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문자가 없는 나라에 한글을 가르치는 노력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고대 인도에서 발명되어 아라비아에서 전파시킨 숫자는 만국 공통의 대표적인 표의 문자(ideogram)가 되었다. 편리함, 0의 개념, 기호 추가와 같은 혁신에 의한 성과였고 이는 수학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에 이바지했다. 같은 논리로 한글은 대표적인 표음 문자(phonic alphabet)가 될 수 있다. 체계성, 가독성, 습득성뿐 만 아니라 모든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한글이라면 가능하다. 7,000개의 언어가 통일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4개의 문자 체계를 묶는 것은 노려볼 만하지 않는가? 소리 기록의 표준(standard)이 되는 한글. 한글만 알면 만국의 언어와 소리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글을 더욱 적극적으로 진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나라의 소리를 표기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보편적인 문자(universal alphabet)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라진 글자 (•, ㅿ, ㆆ, ㆁ)와 병서 (겹 낱자)/연서 (상하겹 낱자, 순경음) 등의 표기법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구한말『태서 신 사람요(泰西新史攬要)』의 외래어 표기법은 이러한 관점에서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것이 모든 소리 (바람, 학 울음, 개 짖는 소리 등)를 너무나 맛깔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바람을 이루는 길이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라 국제 음성 기호 (International Phonic Alphabet, IPA)에서 유용한 기호들도 적극 도입하면 좋겠다. 강세, 음 길이, 성조, 억양 등을 표시하는 기호들 말이다. 이를 통해서 외래어를 정확하게 표기하고 발음하게 하는 것이다. 한글 맞춤법을 완전히 버리자는 말은 아니다. 한국어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은 재검토해 볼 만하다고 본다. 외래어 표기법의 목적은 한국어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음운 구조와 체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이지만 현재의 표기법으로는 원어의 발음을 정확하게 구현하기 힘들다. 따라서 사라진 글자와 표기법의 재도입 및 국제 음성 기호의 응용 등을 통해 한글의 잠재력을 더 이끌어 내자는 것이다.
미국에서 "한글날"지정과 증가하는 한국계 정치인들을 보면서 혼자서 상상해 본다. 숫자를 배우듯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는 미래. 각 나라의 언어와 소리를 모두가 정확하게 읽고 발음하는 데 사용하는 소리 기록 표준 문자가 된 한글. 보이저 3호의 골든 레코드[3]에 전 인류의 언어와 소리를 표기하는 로제타석의 역할을 하는 한글을 상상해 본다.
[1] 한국인의 미국 이주는 크게 세 번의 큰 물결로 이루어졌다. 1900-1950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계약 노동자와 독립운동 정치 망명자들; 1950-1964년 국제결혼(미군)과 해외입양, 유학생들; 그리고 1965년 이후 중산층 계층과 가족단위 이민으로 구성된다.
[2 ]그 이면에는 복합적인 인종차별 문제와 사건들이 있었지만 글의 흐름을 위해 단순화시켰다.
[3] Voyager. NASA에서 두 번에 걸쳐 발사된 외우주 탐사선. 인류 역사상 가장 가장 멀리 항해하고 있고 4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인류 문명에 대한 정보(60개 언어의 인사말 등)를 담은 골든 레코드가 실려있다.
[상단 이미지] 1992년 LA 폭동 당시 자신의 상점을 지키는 리처드 리씨 (©David Longstreath / AP 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