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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mi H Jan 11. 2021

Quarter-life Crisis (1)

지금 생각해보면 난 사춘기를 그리 심하게 겪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히 호르몬 변화에 따른 감정의 굴곡은 있었지만, 반항이 심했다 거나 부모님이 등짝 스매시를 날릴 만한 사고는 치지 않았다. 고집 세고 내 마음대로 였지만 정해진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던 아이였다. 오히려 대학교 진학 후 주민등록상 성인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이지 끊임없는 나에 대한 질문이 시작됐다.  


조그마한 시골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통제 받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몇 달은 한껏 들떠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었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집에 돌아갔었고 30분 거리에 있는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순수했던 시골 소녀는 몇 날 며칠 잠 못 이루었다. 


어릴 적 TV에서만 보던 대학 생활의 낭만은 없었다. 지금 보다야 훨씬 덜하지만 2000년 대  중반에도 취업에 대한 불안감은 컸고, 같은 과 친구들은 입학하자 마자 학점 관리를 해야 한다느니 공모전에 참가해야 한다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난 겉돌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너 토익 봤어? 900 이상 맞아야 되는데, 나 강남 학원 끊었어.” “회사 어디 갈지 정했어?”,  “우리 공모전 참가해 볼래?” 이런 끊임없는 질문에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서 내 대답은 항상 같았다. “아니 아직 토익 시작도 안 하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서…. 하고 싶은 게 있어야 회사나 부서도 정할 것 아냐.” 이런 대답에 주변 사람들은 날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나랑 뜻이 맞는 사람들 몇몇과 만 교류하며 그 대다수의 사람들을 '이상한' 이들로 취급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했으니까.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더 큰 나라이고 인구도 훨씬 더 많다.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당시 한국보다 국제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만들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 큰 문화 충격을 받았다. 일본 유학도 다들 한번씩 가니까 통과 의례로 왔던 나와는 달리,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뚜렷했다. 주위의 일본 친구들도 이미 취업 준비를 위해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회사의 설명회에 참석하며 차근히 준비해 나가는 모습을 보니, 문득 ‘나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과 함께 나만 도태되어 간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인간이라는 게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불안해지기 마련. 그렇게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떠올려 보면 우울한 회색 빛이 떠오른다. 근처 쇼핑몰에서 옷을 산 큰 가방을 들고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회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불현듯 신나게 쇼핑에 열중하고 전날 친구들과 신나게 마시며 놀던 내가 한심해 보였다. 그날 밤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TV소리로 적적함을 달래며 다시 한번 ‘난 뭘 해야 하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아가 형성되는 20대 초반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아직 학교 생활 밖에 해 보지 않은 나,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아이’ 였기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 밖에서 생활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인 나를 발견하면서 지금까지의 내 삶의 여정에 영향을 줬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길을 걸어가는데, 긴 가발을 쓴 중년 남성이 빨간 립스틱에 검은 스타킹, 그리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편의점에서 여성 용품을 사는 것을 보았다. 한국이 그 당시만 해도 이런 개인적인 취향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히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다음 날 친구에게, “나 처음으로 여장 남자를 봤어. 사실 조금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는 못했는데…” 라고 말하니, 친구는 “이런 사람들 많고 무서워 할 필요도 없어. 자기 취향이니까 우리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잖아?” 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또, 처음으로 후리타 (정규직 이외의 취업 형태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전혀 남들의 눈을 의식 하지 않은 채 생활하는 것을 보며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 때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자신에게 끈질기게 묻고 또 물어보았다. 졸업을 앞 둔 학생이라면 모두들 하는 고민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고 혼자 숨어 있던 시기였다. 다들 어디에 서류 넣어 본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들리지만 나도 해야지 라는 동기 부여보다는 이상하게도 싱숭생숭한 마음만 들었다. 한국에서 취업 준비를 해야하는 것인지, 그럼 똑같이 대기업에 원서를 내봐야 하는 것인지. 그 당시 내 안에서 가장 충돌 했던 것은 “사회의 시선 vs.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것” 이었다.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취업 준비를 한다면 ‘대기업’ 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여기서 왜 자존심이 상해?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하고 싶지도 않는데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하는 내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리만큼 싫었다. 


대학교 3학년 말에는 마음을 굳혔다. 한국 밖의 새로운 곳에서 도전을 해 보자고. 그 때는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해서 성공한 나를 보여주고 싶었고 커넥션 하나 없는 곳에서의 도전 또한 넘치는 내 에너지를 쏟기에 충분해 보였다.  




내가 대학생 때만 해도 청년 위기 (quarter-life crisis) 라는 말이 없었다. 사회생활의 주축이 되는 40대 후반부터50대 들의 중년 위기에 더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닥쳐오고 청년들의 실업 문제가 심각해 지면서 청년들이 자기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더욱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평생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 등을 가지는 청년들이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의 20대 초반을 보면 이런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른’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 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었지만 왜 나는 인생에 대한 해답이 없는지 자책을 많이 하기도 했다. 이땐 몰랐었지, 이것이 청년 위기의 시작이라는 것을. 성인이 되었으니까, 나는 어른이니까 모든 것을 다 알아야 된다는 부담감에서 조금은 벗어나보자. 어른이 되면 저절로 취직이 되고, 결혼 상대는 알아서 나타나며, 직급이 오르는 것도 저절로 이루어 지는 줄만 알았던 순진함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바로 이 시기인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으니 크게 걱정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기성세대들도 한 번씩은 겪었을 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이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네 보자. 커피를 놓고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해도 청년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아는 ‘어른’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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