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철학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에 관하여

by 이길용

여기저기서 마르쿠스 가브리엘 이야기를 해서 그가 쓴 몇권의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곤 덮었습니다. 계속 앵무새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가브리엘은 일전에 제가 페북에서 적었지만 '틈새 철학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신경과학 유물론, 혹은 신경환원주의자들에게 거칠게 저항하며 21세기 새로운 실재론의 표본을 보여준다고 적잖은 칭송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만큼 철학의 새로운 줄기를 여는 개척자로는 읽히지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과 과학적 치환론자들에게 이른바 '철퇴'를 가하고, 정신의 존재성을 ('의미장'이라는 포장을 통해서나마)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의 각광을 받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논지를 꼼꼼히 재어보면, 도리어 보수적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거절해야 할 다원론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 말을 풀 수는 없겠고, 조만간 가브리엘 관련 논문 하나 써볼 계획이니 긴 이야기는 그쪽에서 풀고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을 '21세기의 신실재론자'라 부릅니다. 실재론이란 존재를 인간의 관념속에 묶어두지 않고, 인간의 구성력과 관념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 인정하는 철학입니다. 멀리는 플라톤이 그랬죠.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인간 사유의 구성물이나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이니까요. 그러니까 현대 들어 많은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주체의 상실을 이야기하며, 결국 인간의 정신도 뇌라는 구체적 신체 조직의 전기화학적 작용의 결과적 통합물이라느니, 사회적 물적 토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구성물이라든지, 물적 조건을 지닌 인간 심리의 투사작용의 결과물이라든지로 해석되는 일체의 구성주의에 반기를 듭니다. 정신은 따로 실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죠. 이런 가브리엘의 외침이 그동안 물리주의자와 유물론자들에게 실컷 얻어맞던 일원적 유신론자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세속 철학자 입에서 어쩌면 종교와 신앙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구호가 터져 나오니 반가웠겠어요. 그러니 성급하게 가브리엘을 유물론자와 물리주의자들의 전선에 앞세우며 전투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잘 살피면, 가브리엘은 현대 과학의 일원적 세계해석 자체를 거절하는 거였고, 그렇게 우주의 보편원리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의미장(Sinnfeld)'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존재는 단독적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믿음의 반영입니다. 그러니까 일원적 체계로 움직이는 세계도 없다고 주장하다보니, 그런 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일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은 관계로서 실재하게 되고, 그런 관계로 존재하는 것을 일컬어 그는 '의미장'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쿼크 입자가 혼자서는 실재하는 것도 아닌데, 3개 이상의 미립자가 강력에 의해 달라붙어 핵을 이루고, 거기에 전자를 끌어들여 불규칙적 회전운동을 일정하게 해댈 때, 비로소 '원자'라는 이름이 붙으며 물리적 의미장을 구성하여 실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단지 물리적 세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내 모든 경험 가능한 관계가 이런 의미장을 통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 신도 실재하고, 종교도 문화도 법도 모두 각자의 의미장에서 실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전형적 다원주의자이며, 그가 주장하고 파악하는 의미장 자체는 어떤 존재론적 위계도 갖지 않고, 모두 동등한 실재적 존재라는 겁니다.


이러한 가브리엘의 다원적 실재관은 일원적 세계를 바라보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에겐 오히려 '이단적'이라고까지 봐야 할텐데, 도리어 가브리엘을 칭송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결국 가브리엘은 이런 의미장 논리를 통해 일원적 세계관으로 우주를 관통하는 보편원리(혹은 모든 것의 이론, Theory of Everything)야 말로 인간의 구성적 사고의 결과물이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고고한 정신적 활동을 물리적 결과물로 치환하는 과학자들의 행태가 못마땅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논리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전가의 보도처럼 '의미장'을 활용하고 있으나, 이 의미장 자체가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막힐 때마다 의미장 타령이나 하면서, 그것의 실재성을 강조하며 강요하고 있을 뿐, 명쾌하게 자신이 말하는 의미장이 어떤 실재인지 과학적으로 설득있게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가브리엘이 과학적 유물론자, 수학적 보편주의자, 상관적 일원론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원한다면, 최소한 그들이 검토할 수 있는 과학적 언어로 의미장을 번역해내야 하는데, 그는 이 작업을 애써 회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수학적 보편주의의 일원적 '폭력성'을 부각하며 그것에 저항하는 윤리적 구호로는 적당할지 모르겠으나, 그가 정작 전면에 내세웠던 새로운 정신철학의 슬로건으로서 '의미장'은 매우 허약한 논리로 읽힙니다.


결국 이 의미장은 의미없는 순환논리에 빠지게 되고, 가브리엘 스스로 정확한 과학적 논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유물론자들에게 설명해내지 못하면, 그는 정신철학자라기보다는 수필적 윤리명제 구호자로 멈출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그의 '의미장'은 철학계의 'deus ex machina'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막막한 상황이 되면 기중기로 신을 무대에 내려보내 문제를 해결하듯, 가브리엘도 논리적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의미장'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전 가브리엘을 '틈새 철학자'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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