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비건 여행ㅣ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DB 파업
내 생에서 예술과 가장 가까웠던 시기를 꼽자면 유년기가 되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매일 미술, 음악과 함께 보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 다음으로는 미술 학원을 다니며 시간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부모도 여느 한국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체능으로 대학을 보낼 게 아니라면 지속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자연스레 미술, 피아노와는 멀어졌다.
그때 멀어진 그들과의 거리는 지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갑자기 친한 척하고 싶어질 때가 생기는데, 바로 여행을 갈 때이다. 유럽으로 여행을 가면 꼭 미술관을 가게 된다. 예전에 유럽여행 갔을 때 유명하니까 한 번쯤 가보지-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들렀던 미술관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버렸다. 그래서 그 이후로 유럽을 갈 때면 미술관을 꼭 찾게 되었다.
베를린에도 미술관이 많아 욕심이 났다. (베를린은 동, 서로 분단되었던 역사적 특성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서도 미술관이 많은 편이다.) 시간은 짧은데 욕심이 과하면 결과가 애매하게 끝나는 법. 이번 여행이 그랬다. 미술관을 느긋하게 음미하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이도저도 아닌 관람으로 끝나버렸다.
미술보다 진입장벽이 더 높은 영역을 꼽자면 클래식 공연이 아닐까. 클래식 공연을 떠올리면 뭘 입고 신어야 할지부터 걱정되기 시작한다. 매체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있는 격식부터 없는 격식까지 다 끌어모아야 할 것 같은 강박 같은 게 생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빈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교향악단이다. 그중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전 세계 관현악단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왈) 이런 얘길 들으면 안 그래도 진입장벽이 크게 느껴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 큰 강박이 찾아온다. (이미 이 시점에서 드레스라도 챙겨야 하나,는 고민에 빠지게 됨. 드레스 같은 거 없음)
하지만 베를린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지인이 추천해 준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기 때문이다.
* 책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니는 객석을 마치 언덕 비탈의 포도원처럼 설계해서 음향의 민주화를 이루어낸 최초의 공연장이다. 덕분에 가장 저렴한 좌석에 앉은 사람들도 공연에서 소외되지 않는다고 한다.
베를린 필하모니는 자차보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편한 곳으로, 버스 중 주요 노선이 필하모니 바로 앞에 정차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베를린에서는 편한 차림으로 대중교통 타고 공연 보러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이브닝드레스에 하이힐 신고 인터미션 때는 샴페인이라고 한 손에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이런 설명을 들은 이상 베를린 필하모니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매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쉽게 할 수 있었다.
1.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2. [Concerts & Tickets] 카테고리 중 [Calender]에 들어가면 공연 일정이 좌르륵 나온다.
그중 원하는 공연을 선택하면 된다.
*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을 보고 싶다면 필터 설정을 하면 된다. Events - Berliner Philharmoniker 선택
3. [Buy tickets] 버튼을 클릭하면 공연장 좌석이 나온다.
회색으로 표시된 곳은 이미 판매된 자리이고, 색색깔로 표시된 곳이 남은 자리이다.
원하는 자리를 선택하여 결제하면 된다. (가격은 106유로부터 40유로까지 다양하다.)
* 좌석을 선택한 뒤, [Seat Preview] 버튼을 클릭하면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공연장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베를린에 와서 처음으로 저녁 일정이 있는 날. 저녁 8시 공연을 앞두고 베를린 필하모니로 향했다.
필하모니 건물이 빼꼼히 보일 때부터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난히 깜깜한 베를린의 겨울밤, 오렌지빛에 둘러싸인 필하모니는 왠지 모르게 따스해 보였다.
다행히(?)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은 없었다. 다들 캐주얼하게 즐기러 오는 분위기였다. (한국으로 치면, 어떤 느낌일까? 영화관 가는 정도?)
2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연령층이 다양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미리 도착해서 로비에서 술 한 잔씩 하며 공연을 기다리는 게 자연스러운 절차(?)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 사람들은 서서 술 마시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다.)
한쪽에는 코트 맡기는 곳이 있었다. 우리도 코트를 맡기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가장 저렴한 좌석이었기 때문에 위로, 위로, 완전 꼭대기로 올라가야 했다.
어디에 앉아도 공연장이 잘 보인다고 했었는데, 진짜였다. 우리가 앉은자리는 (제일 저렴한) 40유로였는데도 공연장이 잘 보였다.
첫 곡이 끝나고 박수. 클래식 잘은 몰라도 멋지다-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시작된 두 번째 곡. 그런데 첫 곡과 달리 뭔가 좀 난해했다. 현악기로 벌이 윙윙대는 소리를 구현해 내는,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음악이었다. 듣는 내내 '음악이 참.. 현대미술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나, 현대음악이었다.
두 번째 곡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시작되지 사람들이 거의 다 밖에 나갔다. 우리는 다리도 아프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기 빨릴 자신이 없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세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클래식이었다.) 난해한 음악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공연을 계기로 현대음악보단 클래식이 내 취향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운 음률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등등 여러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겪어보지 않은, 나와는 정말 다른 삶이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들)
공연이 끝나자 박수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박수에 화답하며 몇 번이고 인사를 했다. 나도 멋진 공연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를 빠져나가자 관객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우리는 복작거리는 곳에 있기 싫어서 좀 천천히 나갔는데, 너무 굼뜨게 행동했는지 나중에는 뒷정리하는 직원이 얼른 나가라고 했다.
클래식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참 멋진 공연이었다. 그리고 지휘자의 모습을 (거의) 정면으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신기했다. 보통 공연장에서는 지휘자의 뒷모습만 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지휘하는 동안 앞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름 신선했다. (대신 연주자들의 뒷모습을 보게 됨)
일할 때 배경음악으로 가사 없는 음악을 틀어놓는 편인데, 이 공연을 보고 나서는 클래식을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좋았던 공연이었다. (로비에 숍이 있었는데 괜히 음반까지 사고 싶은 충동이 일었음)
배경지식이 없어도 영화관 가듯 편하게 드나들다 보면 클래식과도 부쩍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매주 수요일 무료로 런치 콘서트가 열린다. 난 런치 콘서트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니, 아주 좋았다는 평이 많았다. (공연장에서 하는 건 아니고, 필하모니 로비에서 하는 것 같다.) 일정이 맞는다면 런치 콘서트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DB 기차가 파업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 DB는 독일 철도청의 약자로, 독일 내의 기차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로 가는 기차, 베를린 내 S반 같은 지하철도 운영하고 있다.
DB가 열차 지연 및 파업으로 유명(?)하다는 건 여러 후기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기차를 탈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유명한 파업이 우리가 있을 때도 일어나는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10시가 넘었고, 필하모니 바로 앞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버스 타는 것도 일이겠다 싶었는데, 구글 지도가 지하철로 가는 방법을 알려줘서 우리는 지하철을 택했다.
지하철 역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였다. 쎄한 느낌이 올라왔다. 우리와 같이 역에 내려왔던 한 여성이 전광판에 뜬 안내 문구를 보고 짧은 욕을 내뱉으며 (못 알아들었지만 뉘앙스로 봤을 때 분명 욕이었다.) 다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불안해진 난 전광판에 뜬 문구를 번역기로 돌려봤다. 파업 때문에 운행이 정지되었다는 안내였다.
일이 크게 꼬인 걸 직감했다. 지하철 역까지 왔지만 지하철로는 숙소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숙소 가는 법을 알아보려고 구글 지도를 열심히 눌러댔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이럴 거면 필하모니 앞에서 검색할 때 왜 지하철 경로를 알려준 거니??? 구글아???
8시에 시작한 공연은 10시 조금 넘어서 끝났고, 우리는 역까지 걸어오고 어쩌고 하느라 시간은 10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유난히 깜깜한 베를린의 겨울밤은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역에서 빠져나와 구글 경로를 계속 새로고침하니 버스로 가는 경로가 떴다.
DB 파업으로 너도나도 버스 타기에 동참했는지 정류장에도 사람이 꽉꽉, 버스 안에도 사람이 꽉꽉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지옥철에 단련된 한국인 아닌가. 이번 버스를 놓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악착같이 사람들 사이에 끼여 탔다.
거인들 사이에 낑겨있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베를리너들은 성별 상관없이 다들 키가 컸다. 160도 안 되는 내 키는 모르긴 몰라도 여기 초등학생 정도 키인 것 같았다...) 어떤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내리기 전에 우리를 콕 집어서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해 줬다.
(감사해요. 아저씨, 아주머니)
중간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무사히 숙소 근처 역에 도착했다!
익숙한 동네가 보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시간은 이미 밤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베를린이 비교적 안전한 동네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중간에 한번 울었을 것 같다...
그 유명한 DB 파업까지 겪어보고, 짧은 베를린 여정 속에 웬만한 건 다 겪어본 것 같다...
베를린 여행 팁
DB가 파업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버스 타세요.
S반이나 U반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해도 분명 영향 있습니다. (지연되거나, 취소되거나 등등)
구글 지도 검색했을 때 경로에 S반이나 U반 타고 가는 거 나와도 웬만하면 믿지 마세요. 안 맞을 가능성 높습니다.
* 우리도 당시 파업 때 기차 이야기만 있었고, 구글 지도 검색해도 S반 타라고 나왔었어요. (버스보다 그게 더 빠른 길이니까) 그런데 막상 역으로 가보니 운행 안 하더라고요. DB 파업하면 구글 지도 완전히는 믿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