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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May 22. 2024

사람의 홀대

결혼식과 장례식을 한날에 다녀왔다.

"엄마는 왕따야?"차를 타고 출발을 하자마자 큰딸이 물었다."왜 다들 우리 테이블에 와서 이야기도  안 하고, 갈 때 인사도 안 하고 가?""왕따는 아닌데 오랜만에 만나서 서먹해서 그래" 어쩌다 외가 쪽의 행사에 참석하면 으레 이렇게 살짝 겉돌다가 뷔페로 배를 채우고 큰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인사를 하고 빠져나오기가 바빴다.



그렇게 지내서 별반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외가의 행사에 참석한 남편과 아이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였나 보다. "당신이 홀대받는 거야!"운전을 하는 남편이 한마디 보탰다."뭐... 홀대일 것까지는 없는데...."외사촌의 둘째 아들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에서 자동차로 25분 거리에 있는 리조트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하여서, 좀처럼 행사에 잘 따라나서지 않는 아이들이 함께 가겠다고 하여 가족 나들이가 된 외출이었다.



결혼식은 텔레비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리조트에서 야외 결혼식으로 진행되었고 신랑 신부는 잘 어울리는 어여쁜 커플이었다. 외사촌은 나보다는 한 살이 어렸지만,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학년이 같았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달랐지만 고등학교는 같았다. 그 아이는

 여고 시절에도 우리는 가끔 어울리긴 했다. 한 번은 외사촌이랑, 서울서 전학 와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 한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 갔는데 친구가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는 모습을 외사촌이랑 나랑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이 있다. 외사촌은 스물다섯에 열 살 많은 아저씨랑 결혼을 했다.



외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저수지가 보이는 정류장에서 내려서, 산길과 마을길을 한참 걸어가면 파란 대문의 외갓집이 보였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데려다주지 않아도 동생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서 방학을 다 보내고 오길 수차례였다.



외가에는 자식들이 여섯이나 되어서 시끌벅쩍했다. 우리까지 보태면 외할머니 외숙모 외삼촌까지 11명의 식구들로, 끼니때마다 안방에 커다란 교자상을 놓았다. 말이 없는 외삼촌은 집안이 아무리 야단법석이어도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으셔서, 엄마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버럭 버럭 할 적마다, 오빠는 이런 적 없다고 하셨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우리 오빠"라고 힘주어 말할 때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시골이지만 밖에 일이 많아 집에 잘 안 계셨던 외숙모를 대신해 큰언니가 밥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내 또래의 외사촌과 두 살 많은 오빠, 동네 친구들과 놀았다. 어릴 때는 잘 가던 외갓집이었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는 자연스레 잘 가지 않게 되었고, 스물세 살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외갓집에 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조용한 성격이셨고, 다정하지만 잔정이 없으셔서 말씀을 많이 하지는 않으셨는데도 외할머니가 안 계신 외가는 낯설었다.



큰외삼촌 댁은 가깝기도 해서 자주 갔지만, 둘째 외삼촌이나 막내외삼촌들은 자주 왕래를 하지 않아서 그쪽 외사촌들과는 서로 잘 모르고 지냈다. 엄마는 외가에 잔치가 있거나 제사가 있으면, 아버지와 동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혼자 다녀오시곤 했다.

잔칫집에서 술 드시고 주정할 것이 뻔한 아버지와 같이 가기 싫었을 테고, 궁핍한 살림에 꼬질꼬질한 자식들을 줄줄이 데려가는 것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외사촌 오빠가 야외 결혼식장 입구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우리 식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을 보고는 많이 컸다며 반가운  악수를 했다. 마지막 만났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군대를 갔다고 했다. 혼주인 외사촌 부부에게 안사를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에게도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따라 날이 더웠다.

천막을 쳐놓았으나 쨍쨍한 햇볕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양쪽 집안의 일결은 우리 자매의 임무가 되었다. 엄마는 우리들이 다 을 때에도 형제들이 모이는 자리에 우리를 잘 데려가지 않았고, 함께 쌓은 추억이 없었다. 집안의 행사에서 성인이 된 외사촌 동생들을 만났으나 서먹서먹하고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추억담이라도 펼쳤을 혈연으로 묶인 사이지만 어색하기만 한 관계였다. 이 이러니 하게도 나를 가장 반긴 것은 외사촌 오빠의 부인과 외숙모였다.



식이 끝나고 음식을 먹는 우리 테이블에는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는 부러 다른 테이블로 가서 말도 좀 붙여보고 하였으나,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지만, 오랜만에 행사에 참석한 남편과 아이들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친정에 가서도 편하게 드러눕지 못하고, 일거리를 찾다가 없으면 하다못해 걸래라도 빨았다던, 엄마의 그림자는 이렇게나 길게 궁핍한 유산을 남겼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 네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널브러지고, 남편과 나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집을 나섰다. 원래 오늘  결혼식에는 언니도 우리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는데 새벽에 톡이 도착했다.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셨어!"

그랬구나, 며칠을 의식이 없으시다고 하더니, 언니의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신 지 삼 년 만이었다.



남편 없는 두 며느리들과 손자 손녀만이 지키는

장례식장은 적막했다. 언니 시집살이를 매몰차게도 시켜서 절대 결혼은 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해서. 늦은 결혼을 하는데 일조한 언니의 시어머님이지만, 갖가지 사연으로, 아흔마지막이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문상객 하나 없이 쓸데없이 크기만 한 장례식장에서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으며 오래 머물렀다.



저녁에 문상을 다녀온 동생은 구십 년의 세월을 살았던 한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이 너무도 쓸쓸해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피붙이들도 찾지 않고, 울지 않는, 유일하게 눈물을 보인 문상객이었다. 어쩌면 피붙이가 아니기에, 그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자유로웠기에 눈물을 흘릴 측은지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돌쟁이 딸을 둔 큰 조카는"이제 한세대가 갔다"라고 했다. 큰 조카의 사촌 형은 사일 전에 아기 아빠가 되었다고 한다. 증손주까지 둘이나 보았으나, 실제로는 보지 못한 채 떠나는 삶이었다.




주차장 건너편에는 작은 사물함 같은 안치단들이 회색 담벼락처럼 쭉 늘어서 있었다.

어버이날 엄마 아버지의 왼쪽가슴에 옷핀으로 달아드린 카네이션처럼, 알록달록한 꽃들이 꽂혀있는 안치단들 사이에서 언뜻 봐도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벽을 보듯 서 있었다. 누구를 찾아온 것일까? 큰 딸 또래로 밖에는 안 보이는 아이는 이른 이별을 하였구나...



오래전, 사촌 오빠가 돌아가셨을 때 작은 엄마가 내 나이를 물으셨고, 서른이라고 대답했더니, 이제 우리 세대가 가고 얘네들 세대가 왔다고 친척 어른들께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한 몸조차, 그 몸의 가루조차 가져가지 못하는 마지막에 가져갈 것은 살았던 기억이 아닐까?

그렇다면, 행복한 기억을 자꾸자꾸 쌓아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겠다. 내 손끝에 닿는 사람들과, 또는 나  자신과 더불어 부지런하게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가야겠다. 나는 나를 홀대하지 말아야겠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한 날에 가야 했던 흔치 않은 날이었다. 닥쳐오는 나중의 것들을 도무지 알 수는 없으니, 언제라도  축복과 애도를 기꺼이 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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