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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Jul 19. 2024

엄마의 십팔번, 동숙의 노래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마음~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해

돌이 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 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때는 늦으리~~!!"

넌방에서는  쿵 짜락 짝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맑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때~는 늦으리~~~!!"

무슨 때가 얼마나 늦는다고 저 야단일까?



나는 안방 아랫몫에 배를 깔고 누워서 폭풍의 언덕을 읽다가 코를 벌름거렸다.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는 대목이었다. 위험하고 절절한 사랑이었다. 심심하면 뒤꼍의 논둑에  철퍼덕 앉아서  눈앞에  보이는 얼어 붙은 텃논과 겨울의 들판과 산자락들을 바라보며, 이곳이 영국의 황량한 요크셔  벌판이라고 상상하고는 던 때였다.

우리 집은 브론테 자매가 자라고 있는 낡은 사제관이라고 상상했다.



  햇볕 따사로운 겨울 한 낯, 건넌방에 교자상을 펴 놓고,  잘 익은 김장김치 썰어 넣어 칼국수를 끓이고, 부침개도 부쳐서 동네 아줌마들과 한바탕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실댔다. 일 년 내내 뼈가 빠지게 힘든 농사일에 쉴틈이 없었던 농부의 아내들이, 설날도 지나고 동짓날도  

지나서, 추녀밑 고드름이 성기게 얼어붙는 겨울 한낮에 마실을 와서 막걸리 한잔에, 고단한 한숨을 아랫몫에 묻어두고. 소란스러운 수다도 떨며, 먹고 마시고 노는 중이었다.


노래를 잘했던 엄마의 십팔번은 동숙의 노래였다.

늘 순종적이고 희생적이었던 엄마는, 변심한 애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 어린 여공처럼, 불같은 사랑도 하고, 복수도 하고, 때늦은 후회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던 것일까?

엄마는 노래를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고, 목이 길고 눈이 맑았다. 마른 몸의 엄마가 감당하기엔 삶이 무거웠다. 엄마 어렸을 때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엄마의 아버지는 북한군에게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시고, 홀로 남은 외할머니는 시장 바닥에서 주운 우거지로 죽을 끓여 연명하다가, 엄마와 세명의. 외삼촌들을 데리고  친정동네로 돌아왔다.



엄마는 학교를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했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학교 가는 동네 애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울지도 못했다고 했다. 엄마가 쓸 줄 아는 한글은 이름 석자가 유일하다. 그래서 늘 공부 못한 한을 넋두리로 늘어놓고는 했다. 그럼에도 내가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땐 개가 웃겠다고 말했다.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을 못 보내줘 미안하다고 했으면 이해를 했으련만

엄마는 대학이라는 빛나는 그것이 자신의 딸의 삶에는 가당치 않다고 여겼다. 나 역시 집일의 형편을 알기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엄마가 한동안 우리 집에 와 계실 때에, 가끔 베란다 밖을 보며  노래 부르시던 모습이 선 하다. 평상시에 즐거운 것들을 함께 해본 기억이 없는 우리 자매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엄마를 모시고 노래방 한번 갈 생각을 못했다.

우리 자매들이 엄마와는 달리 노래를  못하기도 했거니와, 불행한 사연에 절여 저 살아가느라 즐거우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울 부잣집에서 식모 살이를 하다 시집와서 반찬을 맛있게 잘 만든다는 용이 엄마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불렀지만

아줌마가 돈 벌러 부잣집의 식모살이하러 가 있을 적에는 용이 아버지가 항구가 되어 아줌마를 기다렸다. 옥이 아줌마는 찔레꽃 순정을 투박한 목소리로 불렸다. 옥이 아줌마는 아저씨가 모는 경운기 뒷칸에 타고 앉아서 일하러 가는 모습을 가장 익숙하게 봤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콩밭에서 일하고 있으면 엄마는 목청껏 아줌마를 불러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밥 먹고 해유!!" 고된 노동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하고 박자를 맞추어 웃었던 그녀들이었다.

옥이 엄마는 엄마랑 맘이 잘 맞았는데 머리카락이 일찍부터 서 그런지 엄마보다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갑자기 "와!! 하하!" 왁자한 웃음소리가  건넌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 질펀한 농담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첫날밤, 서방님, 이런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나절을 푸짐하게 놀던 그녀들은 해거름이 되기도 전에 뭉그적거리며, 두툼한 솜 버선을 신을 밭을 낡은 털신에 욱여넣고, 언덕길을 넘어가서 허리를 구부리고 저녁 쌀을 씻고, 고구마를 찌고 감자를 조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굴뚝의 흰 연기처럼 가늘고 길게 흩어져 갔다. 이제 그곳에 그녀들이 없다.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듣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음치에다 박치라는 말을 줄곧 듣고 살아오다 보니, 사람들 있을 때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집에 가족들이 없을 때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듣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부엌에서 조용히 지낸다. 20대 30대 시절 나의 18번은 김현식의 사랑할수록 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꼭 한곡을 불러야 했기에, 가사를 종이에 적고, 녹음한 테이프를  반복해 들으며, 수시로 연습을 해서 한곡은 제대로 부를 줄

알았다.



가족들이 집에 없는 날, 설거지를 하며 볼륨을

 높여 문주란의 묵직한 목소리를 따라 부르며, 동숙의 노래를 불렀다. 벅벅벅 비누칠을 하여 손빨래를 하며 김현식의 애절함이 더 해진 사랑할수록도, 목을 길게 빼고 더욱 애절하게 불러 보았다.


엄마랑 재미있는 것을 함께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삶은 그저 괴로운 것인데 우리 가족은 즐거우면 안 되었으니, 즐겁고 재미있는 것들은 몰래몰래 했다. 함께 놀고, 먹고, 영화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여행도 가는 사소한 즐거움을 엄마와는 함께 해보지 못했다.


열다섯이 되었을 때 엄마는 외삼촌 댁에 애보기로 보내져서 시집올 때까지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엄마는 그때 키웠던 외사촌 동생들과도 정말 각별하게 지냈고 엄마의 외숙모를 친정엄마처럼 따라서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엄마의 외갓집에 가면 엄마의 외숙모 할머니가 맛있는 과자를 쥐어 주었으니 엄마가 엄청 구박받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고된 노동에 시달렸을 엄마는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닳아 있었고 손톱은 빠지거나 새까맣게 썩어 있었다.


정녕 엄마와 우리는 즐거우면 안 되었던 것일까?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용기 일지 모른다.

우리 형편에 ,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털어 버리고 , 늪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올 용기와 도전이  그때도, 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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