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배우는 와인
나는 때론 인간의 뇌가 새로운 단어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 다닐 때는 그렇게 영어 단어 외우기가 힘들더니, 와인에 입문한 후로는 와인 이름을 까먹는 내 머리 때문에 좌절한다. 하지만 내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다름 아닌 라벨이다. 와인 라벨에 담긴 사연을 알면 와인 이름을 좀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벨 속 그림, 그리고 그 그림에 얽힌 사연이다. 라벨의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 병의 와인 때문이다.
그날도 난 와인 바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찾은 그 바에는 통유리의 와인 저장고가 있었다. 이런 바는 와인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운 좋게도 우리 자리는 저장고 벽과 맞붙어 있었다.
안주를 기다리면서 실컷 와인을 구경하던 내 눈에 병 하나가 들어왔다. 그 병의 라벨에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양의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뭐랄까, 내 눈을 향해 웃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난 아예 유리벽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와인 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막 의자에 서 엉덩이를 떼었을 때, 흥미로운 풍경을 목격했다. 그 옆에 누워 있는 병에도, 그 옆의 병에도, 또 그 옆의 병에도 양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게다가 그들 중 한 마리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팝아트 톤으로 그려진 양이 있는가 하면, 어떤 양은 너무 대충 그려서 양인지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나중에 나는 그날 내 두 눈이 얼마나 큰 호강을 했는지 알았다. 내가 본 와인은 프랑스 와인 중에서도 최고로 일컬어지는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 였던 것이다. 양은 이 와인을 빚는 로칠드 가문의 상징이며, 로칠드 패밀리는 가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화가들에게 양 그림을 주문해 그 그림을 와인의 라벨로 삼는다고 한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그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면면이다. 샤갈, 피카소, 달리, 미로, 칸딘스키, 워홀, 이우환, 심지어 영국의 찰스 왕세자까지 있었으니까.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만난 이후 와인을 마시는 재미가 하나 더 늘었었다.
바로 와인 바에 앉아 라벨 위 ‘예술’을 감상하는 재미. 물론 와인 라벨은 보통 무명 화가가 그린다. 하지만 라벨 디자인을 감상하기 시작하면, 와인 맛은 훨씬 좋아진다. 모든 라벨에는 사연이 있으니까.
프랑스가 고향인 라벨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그림은 그 와인을 만든 와이너리의 전경이다. 때론 가문의 상징인 그림이 쓰이기도 하고, 그 가문에서 제일 잘난 남자의 초상화가 라벨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땐 르네상스 인물화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그것도 와인에 촉촉하게 취한 채로.
몬테스 알파 Montes Alpha
칠레 와인 몬테스 알파의 라벨에는 천사가 그려져 있다. 이 천사는 몬테스 알파 와이너리의 상징이자 성공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투 핸즈 에인절스 셰어 Two Hands Angels Share
투 핸즈 에인절스 셰어는 ‘천사의 몫’이라는 뜻이다. 이 재미있는 이름의 호주 와인은 두 손으로 포도를 받치고 있는 라벨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천사의 몫’이란 말은 오크 통에서 숙성시킬 때 자연적으로 증발하는 와인을 천사가 가져간다고 여기는 데서 생긴 말이다.
루이 자도 Louis Jadot
루이 자도는 부르고뉴의 유명 생산자 중 하나로 라벨에 루이 자도의 로고인 술의 신 바쿠스의 두상이 그려져 있다. 외국에서는 ’바쿠스 와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샤토 칼롱세귀 Chateau Calon-Segur
칼롱은 ‘나무’란 뜻이고 세귀는 이 포도밭의 주인이었던 후작의 이름이다. 보르도의 권력자였던 세귀 후작이 많이 아꼈던 포도밭이라 라벨에 하트가 그려져 있다. 하트 문양 때문에 언제부턴가 칼롱 세귀는 연인의 날인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와인으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