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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얼른 Jan 19. 2023

천천히 나의 감정을 돌아보고 싶을 때

<봄날은 간다>

제작사 피디님하고 미팅을 하면 늘 나오는 스몰토크는 '그거 봤어요?' 다. 

어느 OTT의 어느 감독, 어느 배우의 신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유튜브의 숏폼 콘텐츠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답변 '저도 이제 봐야 해요. 왜 이렇게 볼게 많지.' 현업인 그들도 벅찬데, 일반 관객들은 따라갈 수 있을까 싶다. 바야흐로 미디어 홍수의 시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리얼연애예능프로그램 외에에는 실시간으로 챙겨보는 콘텐츠가 없다. 영화, 드라마는 필요에 따라 공부할 마음으로 뛰어든다. 예를 들어 법정물이 필요하면 그 장르의 작품을 하나 이상 붙잡고 시작하곤 한다. 그러니까 요즘 이게 인기라고 하는 콘텐츠를 챙겨보지 않는다. 아니, 내 능력으론 챙겨볼 수 없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하고, 따지다 보면 볼 건 많고, 볼 것만 많냐? 읽을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어차피 모든 걸 다 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이 너무 빠르다. MZ세대들은 트렌드에 무척 민감하다고 하는데. MZ특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서특인 것 같다. 스윙스의 2013년도 곡 <No Mercy>에 유명한 가사가 한 줄, '젊음은 맵고 빨리 식지. 물론 아냐, 라면'. 이제는 젊음 말고 하나가 더 추가된 것 같다. 콘텐츠는 맵고 빨리 식는다. 자극적이고 빠른 템포의 콘텐츠가 대홍수 시대에서 살아남기 용이하다. 우리는 그런 콘텐츠에 순식간에 달려들었다가, 다시 다른 매운 콘텐츠를 찾아가곤 한다. 그러다 보면 열광했던 콘텐츠는 금방 식는 식. 


세상은 너무나 빠르고, 콘텐츠는 자극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느리고 담백한, 그러면서도 성찰도 오래가는 그런 작품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찾는 영화는 이거다. 


[이 글은 스포가 없습니다. 이 영화 보라고 (혹은 또 보라고) 영업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가 강원도 출장을 통해 그곳의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사랑의 시작부터 끝을 담은 영화이지만, 그 속도가 찬찬하고 섬세하다. 그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웠던 2000년대 초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상우는 영원한 사랑을 믿는 청년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매일 수색역에서 기다리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유전인 듯싶다. 자연의 소리를 수집하기 위해 강원도 출장을 떠난 상우는 그곳에서 영원한 사랑의 대상을 만난다. 첫 만남에 다소 까칠한 은수이지만 그녀가 두른 빨간 목도리처럼, 상우에게 그녀는 자신의 세상을 뒤흔들 자극적인 대상이 되어간다. 일을 하며 가까워진 둘 사이에서 은수가 묵직한 한방을 먼저 날리기 때문이다.


라면 먹을래요?

(이제는 속이 뻔히 보이는 플러팅 멘트의 원조가 되는 대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은수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그들은 본격적인 사랑을 키워간다.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상우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웃음이 피어난다. 보고 싶다는 은수의 목소리에 택시를 하는 친구까지 불러 서울에서 강릉을 가는 열정도 보여준다. 더없이 좋을 인생의 봄이다. 


사랑에 빠져 오로지 은수만 보이는 상우. 그런데 은수는 상우와 같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이혼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상우와 다르게 생각이 많이 보이는 은수. 알쏭달쏭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영화가 상우의 시점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은수의 과거사에 대해 상세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우는 자신의 차인 SUV(갤로퍼)처럼 현재만 바라보며 돌진하지만 은수는 자주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상상하는 모습이 상우의 시선을 통해 보인다. 이 차이점이 그들의 사랑의 균열을 알린다. 



이 영화는 컷의 변화가 많지 않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대사를 전달할 때 컷을 쪼개 보여주지 않고 주로 하나의 테이크로 상황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그 안에서 대사를 주고받고 때때로 동선을 이어가며 감정을 전달한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영화가 의도한 이야기 속으로 흘러가기보다는 영화 속 그 상황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쨌든 이야기는 상우의 시점으로 흘러가기에 상우라는 캐릭터를 더 이해하기 쉽지만 영화 전체로보면 특정 캐릭터의 감정을 강요하게끔 설계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보고 있는 지금 그 시점의 관객의 마음에 따라 상우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를 이해하고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큰 장점이라고 본다.


또한 영화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다양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변하지 않는 영원의 사랑을 믿는 상우.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매일 찾는 치매 할머니. 항상 그곳에 변함없이 있는 자연과 공간과 소리. 이는 변하지 않아 보이는 것으로 그 결이 비슷하다. 반면, (상우의 시선에서) 점점 떠나가는 은수. 빨리 익고 빨리 식는 라면. 계절의 흐름. 과거를 나타내는 박물관이나 끝을 암시하는 죽음(무덤). 등은 시간의 흐름 속에 맞이해야 하는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조 속에서 지금의 나는 어떤 캐릭터에 더 이입할 수 있는지, 과거엔 어땠고, 미래에는 어떠할지 생각해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점점 사랑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 상우의 시간이 매우 느리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느꼈던 때가 있었다. 이별을 체감하면서 나의 온 세상이 무너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 이 좌절과 우울은 절대로 절대로 극복될 수 없다는 생각.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한 것 같다. 이별로 인해 맞이하는 변화는 늘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학습했기 때문에 조금 더 무뎌진 감이 있다. 첫 이별에 화들짝 놀랬던 나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주변의 많은 것이 변하면서 자연스레 나도 변했기 때문인 것 같다. 


상우의 대사 하나하나에 무릎을 탁 쳤던 나에서, 이제는 은수의 감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나까지의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내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시간은 (영화 속) 마치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변화가 있는 섬세한 자연의 속도와 같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의 시간과는 큰 폭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요동치는 상우의 감정과 다르게 영화는 꾸준히 차분하다. 빠른 컷 편집 호흡에 익숙한 요즘에 보기에는 영화가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의 감정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폭풍 같은 변화를 찬찬하고 깊게 몰입하고 사유할 수 있다. 그 속도에 적응할 때쯤 영화가 끝이 나면, 세상의 변화에 쫓아가다 보니 체감하지 못했던 내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빠른 시간 안에 트렌드를 읽고 성찰을 바라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본다. 트렌드와 성찰은 교집합이 있을까. 우리가 트렌드의 도파민에 너무 중독된 나머지 짧은 시간 안에 소비할 수 있는 '유머나 공감'의 소재를 성찰로 헷갈리는 건 아닌지 물음표를 던진다. 빠른 것은 트렌디할 수 있어도 성찰은 보다 긴 사유 속에서 온다고 믿는다. 


상우는 영원한 사랑의 꿈을 지속 지킬 수 있을까? 그는 어떠한 변화를 맞이할까?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 <봄날은 간다>는 넷플릭스, 티빙, 왓챠에서 볼 수 있다. (광고 아님. 2023년 01월 19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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