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에 관하여
나는 늘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의 가장 큰 장점을 추진력이라 평했다. 무언가 해보고 싶은 일들을 곧잘 행동에 옮겨왔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이걸 할만한 사람인가" 등의 걱정은 늘 앞섰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보다 "Think global, Act local" "하다 보면 안다" 등의 말들을 더 좋아했고 믿었다. 일단 시작하다 보면 걱정만큼 우려도 적었다. 중간에 여러 이유로 그만두더라도, 그래서 누군가 손가락질하더라도 (물론 마음은 아프지만) 시작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내가 아직 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완성된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조금 어리숙해도 부딪히면서 배우는 거고, 쉽진 않겠지만 모든 어려움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었다. 영상도 만들고 사진도 찍었다. 산문과 짧은 소설을 쓰고, 시도 썼다. 모임을 만들고 크고 작은 일들을 기획해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 조금씩 겁이 난다. 도전에 대한 의식보다 걱정과 두려움에 대한 의식이 더 강하게 나를 덮친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게 나를 가둬버리는 의식이 전이할까 봐 두렵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전만큼 도전에 앞서 패기가 사라지는 것일까. 그리고 내린 결론은 열등감이었다.
내가 꿈꿔온 만큼 내가 크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내가 세운 목표가 높았고, 충분히 클 수 있는 만큼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늘 전보다 성장함을 느꼈고, 예상했던 일들은 아니더라도 꽤 멋진 커리어들도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러나 열등감은 타인으로부터 완성되었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잘 해내는 사람, 잘 만든 영화와 영상, 잘 쓰인 글 등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는 왜 저렇게 못했을까"라는 무의식은 나의 과거의 도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을 보고 열등감을 느꼈다. <스위트홈>이 내 기준에서 최고의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도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몰입감 있게 해당 시리즈를 감상했다. (원작을 안 봐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비주얼화 된 각기 다른 괴물들도 너무 재밌었고, 수많은 캐릭터들의 설정이나 캐스팅도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응복 연출을 비롯한 작가진, 스태프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곧바로 열등감으로 전이되었다. "나는 왜 저기에 없을까" "나도 저런 걸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그러려면 나는 뭐부터 해야 하지" "늦은 걸까. 나 뭐 했지"
이러한 열등감은 적당히 조절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열등함을 자극하는 것들을 멀리하며 편안함이 있는 삶을 안주하거나, 자기 비하를 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길에 빠질 것이다. 두 가지 다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분노를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닌데, 내 뜻대로 되진 않고, 주변의 환경과 사람을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결코 (나아지고자 하는) 행동에 도움을 주진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장기하는 그의 책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좋은 음악이란 창의적인 음악이고 창의성은 실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력을 높이려고만 노력할 게 아니라 각자의 실력에 어울리는 나름의 창의적인 세계를 구축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중략) 음악을 하고 싶은데 실력이 모자란 데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열등감은 쓸모없고 말고를 떠나서, 후회만큼 쉽게 씻겨나가지는 않는 감정인 모양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좀 열등하다 해도 별로 상관없고,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장기하는 뮤지션으로서 피아노를 못 치는 것에 대한 후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작년 한 해 작업실에 앉아 음악을 만들기에 앞서 열등감에 휩싸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장기하가 집중한 것은 본인만의 '창의성'을 기르는 것이었다.
장기하도 열등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들도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다 완성된 사람으로 될 수 있었던 건 열등을 행동 에너지로 전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극은 적당히, 그리고 그것을 에너지로 전환하여 오롯이 나만의 길로 나만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주에 어떠한 계기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을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쓰고 올린 글들이 너무 창피해 계정 삭제를 진행했다. 브런치만 해도 훌륭하고 영감을 주는 글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나는 또 부족한 나를 보고 열등감을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금 생각했다. 부족했던 과거의 나를 마주 한다는 건 현재의 내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충분히 긍정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과거의 나는 그 나름의 고민이 많았고, 열심히 많은 것들을 돌파해가며 나만의 속도로 계속 성장해왔다. 미래의 오글거리는 흑역사를 남기기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치열했던 길이 낫다. 과거의 나로부터 전혀 굴복할 일이 아닌 것이다.
열등감은 여러 시공간의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본다. 자기가 뒤떨어졌다고 직시한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왜 과거에 해오지 못했는지에 대한 좌절감으로 이어져, 나는 능력이 없고 안될 거라는 미래로 끝난다. 이 열등감을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열등감을 직시한 현재에서 과거로 전이되는 시점이라 생각한다. 나를 포함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수많은 부족했던 과거의 나와 마주할 것이다. 그것이 "난 안될 거야"라는 무기력한 의식의 결론으로 도달하기 전에, 우리도 우리만의 에너지 전환법이 필요하다. 과거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나름의 방식으로 그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 발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도약 끝에 결국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
자, 우리 모두 각자 과거의 나와 싸워 이겨냅시다.
열등은 우리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