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준 Nov 12. 2023

그저 걷는 것

텅 빈 조용한 거리와 차가운 공기.

쓰린 빈속과 아직은 얼어붙은 머리.

이른 아침, 공복의 모습.



거의 16개월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한 달간은 밀린 잠을 여한 없이 자고 또 잤다. 새벽 거리 깜박 거리는 주황색 신호등처럼 나도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다 늦게 서야 잠에 들었다. 그래도 나름의 양심은 있어서 침대 옆 창문의 블라인드는 치지 않았다. 어릴 적엔 어두컴컴한 게 좋았는데 이젠 그렇지만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어수선한 시선으로 창문에 투여되는 햇살을 보면 졸음이 조금이나마 덜어내지는 듯하다.



밀린 피로가 어느 정도 무뎌진 뒤 새로운 목표 하나를 세웠다. “오전 7시 기상 후 아침 산책하기”. 직장을 다닐 때에도 항상 오후에 출근했던 나로서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무거운 눈꺼풀과 육중한 어깨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면 옷을 주섬주섬 껴입곤 밖으로 나간다. 아침 공기는 참 상쾌하다. 최근까지만 해도 완연한 가을 날씨였는데 며칠 전 비가 온 뒤론 하루 새에 기온이 10도나 내려갔다. 내일부턴 보온에 좀 더 신경 쓰고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항상 뭔가 답답하거나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혹은 해답이 생각나지 않거나 생각이 너무 많을 때 밖을 걷곤 했다. 무작정 나와 걷다 보면 생각을 비울 수 있다 생각했지만 나의 경우엔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지곤 했다. 하지만 요즘의 산책은 오히려 반대의 성격을 띤다. 요새는 생각이 없다.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걷는다. 이건 다른 의미의 없음인데 생각의 결여로 인해 생기는 없음을 인지하고 불안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가냘픈 몸짓이다. 이 행위는 어찌 보면 이사와 비슷하다.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다 보면 우연히 찾던 물건을 찾기도 하고 과거의 나도 잠시나마 돌아보게 된다. 비우고 비워 결국 없어진 후에 처음으로 쌓이는 건 그게 무엇이 되었든 크기와 상관없이 투명하고 선명할 것이다. 나는 나를 철저히 비우고 다시금 채우기 위해, 또 가득 채워버리고 차근히 덜어내기 위해 밖으로 나와 걷는다. 그저 찬바람을 맞으며 홀로 걷는 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반 년 만에 쓰는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