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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준 Mar 09. 2022

내가 없는 사진 속

 우리 집엔 흔한 가족사진  장이 없다. 가족 구성원이 드문드문 모인 사진은   있긴 하지만 가족사진이라고  만한 사진은 없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달이 조금 지났다. 늦은 새벽 퇴근  새로  안마의자에 앉으니 사진  장이 눈에 띈다. 거실 소파  벽면에 걸려있는 액자   모습은 찾아볼  없다.  속엔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매형과 어린 조카들이 둘째 조카의 돌을 맞아 푸른 잔디밭 위에 서서 웃음 짓고 있다. 일을 하느라 참석하지 못한 내가   있는 거라곤 사진을 보며 그때의 장면을 상상해  뿐이다. 그러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사실은 내가 죽어서 돌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아닐까?” 하는.  그런 쓸모없고 부질없는 생각.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도 보았고, 나 자신을 죽음이란 늪에서 발악하다 놓아본 적도 있다. 삶과 죽음의 양면을 가까이서 느끼며 깨달은 사실은 그 양면의 틈은 정말이지 얇고 비좁다는 것이다. 그 아주 미세한 한끝 차이는 너무도 단순하여 어이가 없을 정도다. 25년의 시간을 함께 하였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헤어짐은 내게 현실을 고스란히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말 마지막이었는데 난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그때의 그 행동과 그 이전의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럽다. 아마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난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이젠 가령 내가 없어진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또 보내게 되는 날에도 그 주변에서 난 항상 머물러있을 것이고, 그 슬픔과 공허함을 추억과 후회와 눈물로 메꾸어보려 하겠지만 이내 체념하고 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게 아니라 그 흐른 시간 동안 조금씩 단단해진 내가 무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그 아픔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중이다. 훗날 비슷한 실수를 했다며 자책하는 내 모습을 더는 용서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왜 어렴풋이 보이는 건지. 흐릿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피하려 하는지. 어쩌면 난 그저 영혼이고 싶은지도 모른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래도 가족사진을 찍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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