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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렌디퍼 Oct 17. 2024

도둑질

안녕하세요.

부치질 못할  편지지만, 그래도 한껏 용기 내어 끄적거려 봅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본건, 아마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고 이튿날쯤 되었던 것 같아요.


병원 주차장에서부터 엎치락뒤치락 동선이 겹치던 당신은 그날 무릎정도까지 오는 레깅스와 후드티에 파란 야구캡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마름에 적확한 당신의 옷매무새 그 와중에 눈길이 가더랬습니다. 적어도, 많이 양보하더라도 30대 초반 되었을 법한 당신의 나이가 부러웠습니다. 그런 당신은 계속 나의 동선과 일치하는 듯하더니, 울려대는 핸드폰을 잠시 확인한 순간 제 앞으로 앞서 걸어갔습니다.


마른 몸매에, 긴 생머리가 허리에서 춤을 추듯 노니는 뒷모습이 참 예뻤더랬습니다. (참고로 저는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지요.)

그런 당신이 어, 어, 하는 사이에 방사선치료실로 익숙한 듯이 입장하더라고요.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나와 같은 환자였다니요.


그리고 이어 탈의실에서 조우한 당신과  나는 각 락커에 열쇠를 열고 탈의 후, 역시나 한 발자국 먼저 당신이 그곳을 나갔을 때, 당신은 민둥머리였습니다.


바로 5분 전, 찰랑찰랑한 긴 생머리로  나의 앞을 질러가며 웃어 보이던 당당한 뒤태는 말짱하게 사라졌습니다.


이후, 우리는 몇 번 더 마주쳤지만 제가 진료시간을 조정하는 바람에 이제는 당신을 만나기가 어렵네요.




이후, 비슷한 환자분들을 꽤 여럿 스쳤습니다. 대부분 가발과 모자로 허전함을 채워가는 분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버렸지요.



감히, 처음 본 당신에게 사과합니다.


나는 젊디 젊은, 당신의 나이와 아름다움을 상쇄시키고 있는 당신의 '아픔'을 허락도 없이 빌려와, 나의  '감사'채우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내 행복과 감사로 바꿔먹기 시작한거에요.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내가, 그래도 젊은이보다 낫지.

나는 그래도 나의 머리칼로 살아내고 있지.

나는 아이도 낳아보았고, 결혼도 했었잖아.'


이기적인 마음으로, 당신의 아픔을 제 감사와 행복에 훔쳐와 쓰고 있습니다. 미안해요.



그치만 약속하나 할게요.

누군가가 저의 아픔을 그들의 감사와 행복에 빌려간다고 한다면 기꺼이 빌려드리겠노라고.


내가 당신에게서 한 도둑질이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도둑질을 당하여 우리가 세상 속에 각자 어디선가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더 큰 감사와 행복으로 리턴되지 않을까요?



많이 아프지 마세요.

그만하면 되었으니 그냥  걸어가세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되어 응원하겠습니다.



제 아픔도 맘껏 누군가에게 감사로 도둑질당하길 기꺼이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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