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에서 머무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부산에서의 루틴은 거의 정착된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블로그 글을 쓴다. 6시쯤 집을 나서서 부산대학까지 왕복 한 시간 걸은 후 바로 헬스장에 가서 근력운동과 샤워를 마치고 온다. 집에 들어서는 나의 멘트는 늘 일정하다. “아들이~ 왔어요!”이다. 가끔 차에 물건을 싣고 오는 상인들을 흉내 낸 멘트이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의 식사 준비가 되어 있고 바로 아침을 먹게 된다. TV는 끄고 대신 유튜브로 호텔 레스토랑에서나 들을 법한 음악을 틀어둔다. 어머님이 조리하신 음식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식사 자리는 늘 유쾌한 분위기인데 두 분의 대화가 재미있어서다. 어머님이 한 마디 하시면 아버님이 꼭 그게 아니고를 하신다. 단 한 번도 두 분이 의견을 통일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두 분에게 이런 제안을 드렸다. 한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다른 분은 무조건 “당신 말이 맞소”라고 하시라고 말이다. 나의 제안에 어머니도 복지 회관에서 ‘쿠나겠지’라는 노인 대화법을 배웠다고 하신다. 무슨 뜻이냐고 여쭈니 젊은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게 아니고”라며 의견을 내지 말고 "그렇구나"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겠지”는 누군가 어설퍼 보이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직접 개입해서 하려 들지 말고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며 지켜보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자식들이나 손자들과 대화 시에는 “쿠나겠지 화법”을 잘 사용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두 분의 대화에는 그게 적용이 안 되실까? ^^;
아버지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하시고 어머니는 당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며 응수하신다. 매일 그렇게 토닥거리시는 걸 보니 그냥 두 분의 대화방식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좀 지나치시다 싶으면 내가 개입한다. ”아버지, 당신 말이 맞구려.” 해보세요. “어머니, 영감 말이 옳소” 하시고요. 이렇게 셋이서 토닥이며 아침 식사를 마치면 언제나 커피 당번은 나다. 믹스 커피 세 잔으로 식사 후 대화를 잠시 이어간다. 그동안 어머님은 아버지의 약을 챙기신다. 이러면 거의 오전 9시가 되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가방을 챙겨 두 분의 배웅을 받으며 하루의 일정을 시작한다.
출장 일정이 아니면 주로 공유 오피스에서 계획된 일을 한다. 은퇴 후 시간이 무료하다는 건 케바케인 것 같다. Case By Case(케바케)라는 뜻이다. 요즘 진행하는 건은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의 연말 결산보고를 준비 중이다. 하루 일정으로 잡았는데 구청에 보고할 요건이 까다로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그래도 회원들의 연령대나 컴퓨터 사용 능력을 감안하면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싶다. 그리고 틈틈이 개인 프로젝트도 진행시키고 있다. 좋은 점은 지금 시간 보내는 여러 일들이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들이라 직장처럼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쉬고 싶으면 쉰다. 그래도 꾸준히 뭔가는 하고 있다. 그러니 할 게 없다는 말은 적어도 나에겐 조금 낯선 말이다. 사실 할 게 참 많다. 그러나 은퇴자의 삶이 좋은 게 뭔가? 바로 시간의 여유이다. 그래서 오늘의 일은 하루 한 가지만 정하는 걸로 했다. 그것도 오후 5시까지만 한다. 처리를 다 못했더라도 내일로 미룬다.. 저녁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거나 아니면 좋은 벗들과 보내기 위함이다. 이럴 수 있는 게 그냥 좋다.
은퇴 후에는 꼭 돈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유의미한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 일요일인 오늘 두 분에게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보여드리고 아버님이 원하시는 월남쌈을 먹고 왔다. 지금은 오후 시간이다.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피곤하신지 두 분은 낮잠을 곤히 주무신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집을 나와 내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요즘 내 생활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안빈낙도’의 삶인 것 같다. 좀 다른 말이지만 사람은 ‘무언가를 꼭 해야지’ 하는 의지의 마음보다는 ‘끌리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는 마음을 낼 때 더 행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