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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int heavy Dec 26. 2020

영화 [말아톤] 다시보기

장미에 관하여 : [장]애인이 등장하는 [미]디어

 15년도 넘은 영화, 그러나 아직도 호평을 받고 있는 그 영화를 얼마 전 다시 보게 되었다. 몇 년 동안이고 다시 한번 봐야지, 교사의 입장에서 살펴봐야지, 장애인의 가족으로서 꼼꼼하게 다시 봐야지 하고 마음은 먹었지만, 눈물을 쏟을 것을 알기에 쉽게 영화를 보지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마음을 먹고, 주말 동안 말아톤을 다시 보았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전체적인 감상이나 리뷰보다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던 장면, 인상 깊었던 장면을 부분 부분 남겨보고자 한다.



 어린 초원이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초원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장애 선별검사를 받고 있는 장면일 것인데, 이 의사의 나레이션과도 같은 대사가 나의 귀에 거슬렸다.


자폐증은 병이 아니라 장애입니다.
즉, 약이나 수술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이 잘 안돼서 사회생활하기 힘들어요.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게 이 장애의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가족들이 더 지쳐요...


 장애 아이의 가족들이 처음 만나게 되는 의사나 교사는 그 가족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 책임감 있게 말해야 한다. 의사가 내뱉은 말을 곱씹어보니, 장애의 특성이나 양상에 대한 설명이 아닌, 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만 쭉 나열하고 있다. "사회 생활하기 힘들다.", "가장 큰 문제다.", "가족들이 지친다." 등.

  물론 의사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나 가족이 처해질 힘든 상황을 미리 알려주고자 했을진 몰라도, 나에겐 그저 책임감 없는 말처럼 들렸다. 장애에 대해 처음 듣는 부모에겐 수면 아래로 한없이 짓눌러버리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을 것이다. 만약 장애나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먼저 내뱉는 대신, 적합한 훈련과 치료를 통해 기능이 더 향상될 수 있고, 장애이기에 '완치'는 될 수 없지만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아이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든다.


 우리 동생이 아기였을 때, 사고로 인해 뇌손상을 입어 병원에서 한참을 지내며 퇴원할 때 의사선생님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이 아이는 영원히 말할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영원히'라는 그 말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말이다. 지금 우리 동생은 우리 가족 중에 제일 말이 많고, 달리기도 제일 빠르고, 체력도 가장 좋다.




엄마: 엄마 힘들어. 네가 이러지 않아도 엄마 힘들다고.

중원: 엄마는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냐고. 엄마한텐 초원이 밖에 없어.

엄마: 네가 형이랑 똑같아? 말로 하면 될 거 아니야.

중원: 말했어. 수십 번 수천 번. 엄만 한 번도 안 들었어.


 엄마에게 비장애인 둘째 아들(중원)은 덜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초원이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중원이마저 사고를 치고 온 날, 엄마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중원이의 마음이 너무 잘 보인다. "네가 쟤랑 똑같아?"라는 그 말이 데자뷰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것도, 장애인 형제를 챙겨야 하는 것도 내 몫인데, 왜 이럴 때만 엄마는 최후의 무기처럼 저 말을 꺼내 드는 걸까? 말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참 나쁜 습관이지만,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 무언가를 잘 얘기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말한 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엄마 마음만 더 힘들고 아플 뿐이다. 그러니 나까지만 힘들고, 더 이상 이  힘듦이 퍼져나가지 않게 하자.' 중원이는 나처럼 이렇게 커갈까?  



 아빠와 초원, 중원... 셋이서 야구장을 찾는다. 흥을 주체하지 못한 초원이는 치어리더 옆에서 막춤을 추고 있다. 아빠는 중원이에게 넌지시 묻는다. "중원이 아빠랑 둘이서 살래?"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그때까지 아빠는 초원이의 장애를 수용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빠 역시 가정에 안착하지 못하고, 일을 핑계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가족과 공유하지도 않는다. 또 아들들의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면도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찾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큰 아들의 훈련에만 매진하며 자신의 삶을 올인한 아내에게도, 자폐성장애를 가진 큰 아들에게도, 그리고 마음 한편이 짠해지는 작은 아들에게도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우리 아빠도 그랬을까...



담임선생님이 그러더라. 애가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안 한대.
내가 늘 그랬거든 "초원이 힘들어 안 힘들어? 안 힘들지? 힘들지 않지? 좋지? 좋아하지?" 내가 그렇게 15년 동안 다그쳤어. 그래서 이제는 힘들다 싫단 말 아예 못해. 어쩜 초원이는 엄마가 자길 또 버릴까 봐 그렇게 열심히 힘들다는 말 안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거 아닐까?


 너무 마음 아팠던 말. 아이들 중에선 '힘들다.' '싫다.'는 말을 잘 안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사실은 못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끈기를 길러주기 위해서 더 모질게 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정돈 힘든 것도 아니야. 그치?", "이 정도도 못하면 나중에 취업은 어떻게 해?", "저거까지만 하면 그때 쉬게 해줄게~"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다. 그것이 아이를 더 성장시키는 것이고, 교사로서 누나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어쩌면 힘이 들어도 실망하는 엄마와 선생님의 얼굴에 눈치보며 '할 수 있다'라고 말해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그 경계에서 머뭇거린다. 장애가 있단 이유로 약하게 키우고 싶진 않지만, 장애가 있기 때문에 른 아이들보다 더 혹사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초원이는 마지막 결승선까지 달려간다. 그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초원이가 자주 가던 마트, 수영장, 지하철역, 야구장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달린다. 초원이는 앞으로도 일상을 누리고,  삶에서 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과 소통하며 달려 나갈 것이다. 처음 그 의사의 진단에 대항하듯 말이다. 초원이는 수많은 사람들과 손바닥을 맞대고, 그들 사이를 제 속도에 맞추어 달린다. 종종 초원이와 얼룩말만 공존하는 세상에 머무르겠지만, 그 에너지로 다시 사람들 사이를 달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참 따뜻하다. 자장면 네 그릇.

 식탁에 각자의 몫을 비운채로 놓여 있다. 딱 한 사람의 젓가락만 다른 모양으로 놓여져 있지만,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초원이를 비롯한 온 가족이 함께,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을 잘 감당했 뿐이다. 우리 집 식탁에도 모퉁이마다 각자의 수저와 그릇이 놓여있다. 포크가 놓여져 있기도 하고, 나무로 된 젓가락이 있기도 하고, 각기 다른 식기구가 각자의 규칙에 따라 놓여져 있을 것이다. 오늘도 각자의 식기구로,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잘 감당할 수 있길... 가끔은 서로의 속도에도 맞춰주고, 서로의 그릇에 반찬도 올려주고, 흘린 것은 대신 치워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정도라 생각하면 전혀 무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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