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 aint heavy Dec 19. 2020

소설 [산책을 듣는 시간] 다시읽기

장미에 관하여 : [장]애인이 등장하는 [미]디어


 [산책을 듣는 시간]은 청각장애를 가진 수지의 이야기이다. 수지는 어릴 때부터 엄마와 고모, 할머니가 만들어놓은 안전하지만 바깥과는 다소 단절된 온실 속에서 살아왔다. 수화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 수화도 엄마와 둘이서만 사용하는 암호와 같은 손동작이었다. 단조로운 온실 속에서 살아왔던 수지는 특수학교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한민과 친해지게 된다. 아마도 수지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갖고 자유의지로 관계를 맺은 첫 번째 인물일 것이다.




 한민이 수지에게 처음 건넨 말일 것이다.

"너는 어떻게 말해? 고맙다는 말?"

세상에나. 이렇게 멋지고 젠틀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남자라니. 사실 한민이도 훈훈하고 감성적이나 논리적인 멋진 남자로 그려지고 있었지만 저 말 한마디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청각장애인을 만나게 되어 고맙다는 표현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수화 중 손날로 다른 손등을 가볍게 두어 번 치는 '고맙다'라는 수화를 당연하게 썼겠지? 상대방이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인지도 묻지 않고? 한민이의 저 말 한마디는 수지를 청각장애인으로 뭉뚱그려 대한 것이 아닌 개별적인 존재로서 존중해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민이는 시각장애 안내견 마르첼로를 데리고 다니는데, 사실 정식 훈련을 받은 안내견이 아닌 상처 입은 한 마리의 개를 안내견 옷을 입혀 한민이의 단짝으로 데리고 다닌다. 사실 삼성화재(?) 정식 훈련만 받지 않았을 뿐이지 안내견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녀석이다. 수지는 마르첼로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만다. 마르첼로도 역시 수지를 발견하면 먼저 달려와 안긴다. 한민은 이 대목에서도 멋진 명대사를 친다. 나도 20대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내가 좋으면 그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관계를 맺기 전 나도 모르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따지고, 방어자세부터 취하곤 한다.



 수지는 엄마의 완고한 신념(수지를 농인들 사이에서 살게 할 수 없다는 그 신념. 정상(?)과 비슷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그 신념) 때문에 정식 수화를 배우지 못하고 구화를 죽도록 연습하고 익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수지는 차량 소리를 듣지 못하고 경미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 사고를 계기로 엄마와 할머니는 수지에게 인공와우 수술을 밀어붙이게 된다. 수지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인공와우수술을 당한 셈이다.

왜 내가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죠?

이 대목에서 또 뒤통수를 맞는 것 같다. 그렇다. 왜 우리는 '장애를 고칠 수 있당연히 고치고 싶겠지'라고 생각할까? 그들에게 물어보았는가? 어쩌면 그들은 지금 이 상태를 더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는 평균적인 수치를 정상이라고 가정하고, 당연히 그들도 평균이 되고 싶겠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수지는 인공와우수술을 통해 듣게 된 세상의 소리에 오히려 더 비관적이었다. 더 불행했다고 말한다. 소리를 듣지 못했던 세상 혹은 인공와우 전원을 끄고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는 세상을 "아늑하고 편안했다."라고 표현한다.

그 세계가 얼마나 고요한고 평화로운지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물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느리게 느리게.
보이지도 않고 촉각만 있는 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 심해어처럼.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수지의 온실이 되어주던 할머니, 엄마, 고모는 순차적으로 수지 곁을 떠난다. 비로소 수지의 진정한 자립? 독립?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수지는 한민이와 수없이 많이 해왔고, 가장 잘해왔던 '산책'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다. 이 대목에 와서야 나는 책의 제목이 왜 <산책을 듣는 시간>인지 알게 되었다.

산책 신청자들은 나름의 사을 가지고 이 산책을 수지, 또는 한민과 함께 한다. 늘 봐왔던 그 길에서 낯선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옆에서 함께 걷는 듣지 못하는 수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며, 산책 내내 울음으로 그 시간을 채운 사람도 있었다. 함께지만 홀로인 그 시간. 그들은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느꼈을까. 나도 산책이 하고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 주변에 있던 수지와 같은 아이들이 몇 명 생각이 났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원에서 사귀게 된 친구가 있었다. 얼굴도 하얗고 갈색 단발머리를 한 이쁘장하게 생긴 '정현'이라는 친구였는데, 청각장애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보청기인지 인공와우장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귀 근처에 기기를 달고 다녔고, 적당한 목소리로 말도 곧잘 하고, 독화도 가능해서 나는 그 친구와 잘 어울려 다녔다.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청각장애에 대해 몇 년 동안 공부한 지금보다 오히려 그때가 더 편견 없이 그 아이를 대했던 것 같다. 그땐 청각장애를 가진 친구가 아닌 그냥 내 친구 정현이었다. 그 아이가 수화를 하는지 구화를 하는지, 인공와우수술을 했는지 보청기를 착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 아이는 떡볶이를 좋아하는지, 튀김을 더 좋아하는지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지만 그 아이가 몹시도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 반에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생각났다. 처음 그 아이를 만났을 때, 나에게 "선생님,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해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딴에는 배려한답시고 "문자가 더 편하지 않아? 문자해 문자!"라고 답했다. 그런데 아이가 말했다. "저 타자 느려요... 그냥 전화할게요."

전화 볼륨을 가장 크게 하면 그 아이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데... 나는 아이가 소리를 듣는 개별적인 수준에서 생각한 게 아닌, 소리를 못 듣는 청각장애인으로 뭉뚱그려 그 아이를 봤다. 특수교사로서 자격이 있나 싶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장애를 가진 인물들에 대한 선입견, 우리의 고루한 편견도 많이 깨닫게 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할에 대한 편견도 산산이 부서진다. 엄마라는 존재. 특히 장애 아이를 둔 엄마는 장애 아이에게 늘 헌신적이고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장애 아이 뒷바라지만 하며 살 것이란 편견을 가지기 쉽다. 특히 미디어에서는 어머니란 역할 희생의 프레임을 곧 잘 씌운다. 그러나 수지 엄마는 그렇지 않다. 초반엔 수지를 세상에 내놓기 불안해하고 보호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이나 결말에서는 엄마도 수지 곁을 떠나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을 간다. 오히여 수지와 연락도 끊었다가, 이미 유학을 떠나고 외국에서 달랑 편지 한 장으로 알린다. 전통적인 엄마상은 아니다.


 그리고 할머니로 표현되는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우리네 할머니는 어리숙하고 세상 문명에 뒤쳐진 그런 이미지로 그려지기 쉬운데, 수지 할머니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세상 잇속에 제일 밝은 사람이다. 늘 머리며 화장이며 풀셋팅을 하고 있으며, 늘 친구가 끊이지 않고, 돈에 대해서도 빠릿한 인물이다. 묘비병도 멋지게 지어놓고 떠난다.




 우리는 참 편견 덩어리들이다. 아니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장애가 있는 사람보다 비장애인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라 생각한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수지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수지의 엄마를 불행하고 안쓰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가청 범위는 다 다른데, 평균이란 수치로 누구는 비장애인, 누구는 장애인이라고 이원화해버린다.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들도 당연히 나처럼 다 듣고 싶겠지? 모든 색깔을 다 보고 싶겠지?라고 치부해버린다.


"세상엔 무한히 많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그걸 모두 느낄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하나는 느낄 수 있을 거야. 그걸 하나씩 하나씩 찾아 나가면 되지."


 이 소설의 중반부에서 한민이 던진 명대사이다. 가장 와 닿았던 대사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알려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의 개수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우월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연민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각자 알고 있는 것들이 다를 뿐이고, 여전히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말이다.




 혹시 작가님의 경험담인가 해서 정보를 찾아봤더니 그렇지도 않다.

참 좋은 책을 우연찮게 알게 되고, 며칠간 읽고, 곱씹어보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나에게는 나의 삶을 산책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진짜 산책이란 그 말처럼 가볍게,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