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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int heavy Feb 21. 2021

죽는 게 더 낫다고 평가되는 삶

비장애 형제와 특수교사의 경계에서

 10년 전쯤이었을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거실에서 친구네 부모님과 다 함께 TV를 보게 된 적이 있었다. '인간극장'이었는지 비슷한 휴먼다큐 프로그램이었는지, 거기엔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등장했다. 튜브를 통해 음식을 섭취하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간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친구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저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1급 장애인 정도면 차라리 죽는 게 가족들한테도 낫다." 나는 저 말을 듣자마자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의 친구와 그의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의 미동도 없었다. 나의 불편한 감정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된다. 아마 나를 의식하지 못하시고 자연스레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 아버지는 나에게 중증장애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고, 내가 특수교사의 꿈을 꾸고 있는 것에도 자주 칭찬하시고 격려해 주시던 분이었다. 그랬기에 나의 충격은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내 동생의 장애등급이 1급이라는 걸 모르셔서 그랬을까? 장애인 등급제가 폐지되기도 했지만, 그 이전이라고 장애인 등급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함부로 급수에 따라 판단한단 말인가? 같이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권리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똑같이 귀한 가족이자 형제인데, 한 순간에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평가된 것에 일순간 분노가 올라왔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사계절)'에서 본 내용이 생각다. 이 책에선 '잘못된(wrongful) 삶'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1990년대 중반에 강원도에 사는 한 부부가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부부는 해당 산부인과에서 양수검사까지 받았고, 의사로부터 아이가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부는 의사가 다운증후군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장애아이를 출산하게 되었고, 정신적 충격과 앞으로 들어갈 막대한 양육비까지 이를 다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소송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소송 결과를 책에선 이렇게 담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차마 장애를 손해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법원이 장애를 정체성의 일부로 적극 수용하는 입장을 취해왔던 것도 아니다. 우리는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법과 제도의 수준에서 자신이 수용될 수 있도록 해온 노력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이 세상에 잘못된 삶이란 없다는 우리의 변론이 성공하려면, 정치 공동체 일반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누구에게 차라리 죽는 게 나은 편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편이 차라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손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어떠한 자격으로 그 삶을 평가할 수 있는가? 그들의 삶의 목적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타인을 즐겁게 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타인들은 겉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들에게 잘못된 삶이라 판단하고 평가한다. 는 장애가 있더라도 내 동생이 존재하는 편이 훨씬 감사한데, 어째서 본인도, 가족도 아닌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혹여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생각을 함부로 내뱉진 않았으면 한다. 듣는 누군가의 가족 중엔 질병이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젠 우리 사회가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를 '잘못된 것', '열등한 것', '재수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질병의 특성', '장애라는 정체성'으로 인정하고 인식해야만 한다.


 세상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하는 그 어떠한 자의 삶이라도 wrongful이 아닌 보이지 않는 worthful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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