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9화
[대문 사진] 대머리 왕 샤를 인장과 바이킹들의 선단
「생 베흐탱 연대기」에 따르면 856년 바이킹들은 세느 강 연안의 또 다른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퐁트넬르 연대기」는 855년부터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죠.
“7월 18일 시드로크가 지휘하는 덴마크의 어마어마한 선단이 세느 강을 침투해 들어와서 피트르의 요새까지 점령할 기세였다. (…) 이어 33일간, 즉 8월 17일까지 노르망디 베르농은 강력한 선단과 합세하여 세느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합세하여 페르슈 숲 가까이에까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했다.”
베르농이란 우두머리는 비요흔(Björn)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며, 비에르 코스태 훼레에를 상기시킵니다. 기욤 드 쥬미에쥬는 이 작자를 가리켜 갈리아 인들이 입었던 털바지를 입은 라그나르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전설의 비요흔 야른시오아(허리에 칼을 찬)이란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이킹들은 「생 베흐탱 연대기」가 묘사했듯이 항상 겨울을 나기 위해 죄호쓰에서 동면했던 것은 아닙니다.
“12월 28일 덴마크의 해적들은 파리 도성을 공격하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스테파노 성인에게 봉헌된 대성당만 제외하고 대부분 교회들을 불태웠으며, 생 제르맹 데 프레와 생 드니 수도원들을 불 질렀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곳은 어마어마한 은화를 지불하고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음 해 보스에 침입한 바이킹들은 샤르트르까지 거슬러 올라와 도성을 점거했습니다. 흐로보 주교는 그들로부터 빠져나와 위레(Eure) 강을 헤엄쳐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퐁트넬르 연대기」에 따르면, 857년 시드로크는 세느 강을 떠났고 비요흔은 강 연안의 또 다른 섬에 농성하기 좋은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섬은 「생 제르맹의 기적」에서 오셀루스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애무앵 섬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우아쎌과 트흐빌 라 히비에르 사이에 위치한 생트 카트린느 섬을 가리킵니다.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이 섬에다가 도롤므르(Þorhólmr ; 스칸디나비아 신을 가리키는 도르(Þórr)란 이름이 붙은 섬을 단순하게 도로르(Þórôr)라 불렀습니다)란 이름을 붙였죠. 이 말은 라틴어로 토룰무스에 해당하는데, 로베르 르 마니피크가 1030년에 붙인 또 다른 명칭 토룰리나와 같은 용어입니다.
“루앙 지역을 가로지르는 세느 강에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을 토룰리나 또는 오쉘루스라 부른다.”
858년 1월 9일 퐁트넬르 수도원이 결국 불타고 말았습니다. 세느 강 저지대에 아직도 남아있던 수도사들은 깡토빅 근처의 솜 지방 너머에 위치한 생 방드리유에서 가져온 성물함들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을 지키고 있었죠. 그들은 나중에 「퐁트넬르 연대기」를 집필하면서 이 지역에 침입한 바이킹들의 첫 번째 침공을 상세하게 다룬 가장 탁월한 저술을 남깁니다.
「생 베흐탱 연대기」에 따르면, “해적들 우두머리였던 베르농은 세느 강에 정주하고 있었다. 이때 베흐베리 궁전에 머물던 샤를 왕과 마주했다. 베르농은 샤를 왕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우호를 다짐했다.”
기분전환으로 술책을 동원하기까지 했던 바이킹들은 4월이 되자마자 프랑크 왕국을 급습하기 위해 두 갈래로 원정군을 급파합니다. 생 드니와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장들이 부활절 축제를 성대하게 준비하던 때였죠.
그 첫 원정군은 샤를마뉴의 외손자이자 국왕의 대법관이었던 루이를 향했고, 두 번째 원정군은 그의 이복형제였던 파리 대주교인 고즐랭을 목표로 했습니다.
“바이킹들은 이들을 살려주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몸값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샤를 왕국의 교회들은 명령에 따라 엄청난 보물들을 조공해야만 했다”라고 「생 베흐탱 연대기」는 전합니다. 이어 여름 내내 바이킹들은 브쌩 지역을 약탈하고 “바이외의 주교 보흐루아를 살해”했습니다.
[1] 위의 사진은 삼각형 칼날이 특징이고, 아래 검은 칼날이 긴 검으로 9세기-10세기 때 사용되던 검입니다. © 에브뢰 박물관. 장 피에르 고데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