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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Mar 14. 2024

그림 한 점이 떠민 여행

몽생미셸 가는 길 151화


그림 한 점을 바라본다. 파리 16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부가 있는 하느라그(Ranelagh) 인근의 공원 끄트머리에 위치한 마르모탕-모네 미술관을 향한 발걸음은 결국 클로드 모네의 그림 한 점 앞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쥬리 미술관을 드나들면서 영 맘에 차지 않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그림 앞에 섰으니 마음마저 흔들리던  「수련」 연작조차 눈에 차지 않는다. 나는 오직  「일출, 해 뜨는 인상(Impression, soleil levant)」만을 보고자 이 길을 달려온 것이다.


클로드 모네, 해 뜨는 인상, 파리 마르모탕-모네 미술관.

 

나는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화가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머릿속에서 스크린을 형성하며 필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마네는 그렇지 않다. 도전적이고 선정적이며 도발적인 성향을 지닌 이 파리 태생의 화가는 간혹 시류에 영합한 작품들도 그렸다. 마네의 삶과 모네의 삶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그 두 화가가 행복하게 조우하는 곳이 인상주의일 따름이다.


모네는 마네처럼 예술가인양 자처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예술가임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예술계 일인자가 되고 싶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마네와는 다른 모습이다. 모네는 화가의 눈에 비친 인물과 사물과 풍경을 화폭에 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실하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순수한 예술가적 태도인가? 진정 모네는 작품으로만 자신의 예술을 대신했다. 오늘날 클로드 모네를 가리켜 ‘인상주의의 완성자’라 일컫는 것도 다 그 같은 화가의 치열한 창작 태도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중등학교 역사 과목(국사, 세계사) 선생이셨다. 아버지의 역사관은 때로 흔들리긴 했지만, 조선의 유교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철저한 성리학 신봉자인양 지나칠 정도로 충, 효 사관에 집착했다. 아들 둘 모두가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는 ‘서생의 꿈’을 품은 양녕대군 16대손, 그러나 장남은 일찍부터 그림에 눈을 떴고 차남인 나는  ‘글’에 매달렸다.


그림 그리는 일은 쿠르베가 되기를 꿈꿨던 장남의 몫이었고 차남인 나는 자연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둘 다 아버지의 원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꼬락서니이긴 하지만 나는 그걸 통쾌하게 생각했다. 형은 달랐던 것 같다. 손재주가 능숙한 형은 결국 화업(畫業)의 길로 직행했다.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개척해 갔다.


나름의 길을 힘들여 개척해 가면서도 어린 시절 무릎 위에 앉히고 어린 내게 고흐의 화집을 넘기던 아버지 집에 세 들어 살던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이제 되돌아 생각해 보니 노란색 표지 장정을 한 그 두툼한 화집은 아마도 타센(Taschen)이란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유럽을 떠돌면서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와 소묘,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수채화가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만족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아내가 좋아했기에 나는 여행지마다 그림을 남겼다. 그림을 그리면서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학창 시절 그림 그리는 친구들 덕분에 그림에 대한 식견을 넓혀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파리 생활을 거의 문학예술을 궁구 하는데 할애했다.. 또한 우주적 사고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늘 궁핍했고 비참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일도 빈번했지만 그때마다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파리의 삶이었다. 외롭고 적적할 때마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미술관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네의 「일출, 해 뜨는 인상」이 걸려있는 마르모탕-모네 미술관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2007년 봄, 드디어 나는 여행을 서둘렀다. 모네 그림의 배경이 된 르 아브르(Le Havre)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림 한 점이 여행을 하게 만든 것이다.


모네는 어린 시절을 보낸 르 아브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기거하던 중 이 그림을 완성했다. 가난했던 화가는 성공하고 싶었으리라. 아내와 아들 앞에서 떳떳한 가장이자 아버지이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리는 그림마다 세간의 관심을 끌기는커녕 비아냥과 비웃음을 들어야만 했던 화가는 성공의 의지에 불타는 그림을 그린다. 그게 바로 「일출」이다.


시나이 산에서 통성기도를 하며 일출을 고대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일출’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새해 첫날 대한민국 최고의 일출 전망대를 찾아 섣달그믐날 밤 대이동을 하는 젊은이들의 속내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은 어떤 것일까? 대체 일출이 상징하고 있는 바가 뭘까? 무엇 때문에 세계 인류는 ‘일출’에 그렇게 목말라하는 걸까? 해답은 간단치 않다. ‘빛의 부활’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현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모네의 「일출」은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빚진 부분이 많다. 보불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도망친 모네가 직접적으로 눈뜬 터너의 화풍에 기댄 영향은 「일출」에서 보듯이 터너가 표현한 해돋이 풍경을 담은 그림에 동그마한 해를 똑같이 그려 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윌리엄 터너, <깔레의 해변>, 1832, 베리 미술관(왼쪽 그림)과 <주홍색 일몰>, 1830-1840, 런던 테이트 갤러리(오른쪽 그림).


1874년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간 파리 카푸친 대로 35번지 사진작가 나다르(Nadar)의 작업실에서 열린 <화가, 조각가, 판화가 동맹조합> 첫 전시회에 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때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동생인 에드몽 르누아르가 모네에게 ‘르 아브르의 전경(Vue du Havre)’이 아닌 다른 제목을 붙여달라고 요청하여 모네가 ‘인상’이란 용어를 넣어달라는 부탁에 따라 ‘일출, 해 뜨는 인상’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전시장을 찾은 샤리바리(Charivari)의 미술 평론가 루이 르화가 인상파 전시회(L’Exposition des Impressionniste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악의적인 말장난을 한 탓에 일군의 화가를 가리키는 말로 ‘인상파, 인상주의’란 용어가 비롯된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상파 낙선자 모임 첫 전시회가 열린 파리 카푸친 대로에 위치한 사진작가 나다르의 아틀리에 옛 모습과 현재 모습.


모네의 이 그림은 르 아브르의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미로테 호텔(Hôtel de l’Amirauté) 유리창 앞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아미로테 호텔은 온 데 간데없고 대신 머큐리(Mercure) 호텔이 들어섰다. 품격을 갖춘 아코르 그룹 체인 호텔의 위용은 어디서고 찾아볼 길이 없는 르 아브르의 머큐리 호텔에 실망했지만, 2007년 그해 봄날은 모네의 그림 덕분에 행복하기만 한 나날들이었다.


호텔방에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동이 터오자마자 거리로 나섰다. 모네의 그림 속 동그마한 해를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동터오는 새벽 분위기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봄기운 탓에 항구는 습기로 가득 찼고 일출은 고사하고 떠오르는 태양의 보랏빛 노을조차 보기 어려웠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속상한 맘에 들이부은 화이트 와인의 차가운 취기가 온몸을 쩌릿쩌릿 만들어 놓을 즈음 날이 완전히 밝아 호텔 밖으로 나가 모네가 그렸음직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클로드 모네가 <일출>을 그렸음직한 곳에서 바라본 풍경


누가 저 사진 속 풍경을 모네가 그린 「일출」의 배경이라 생각하겠는가? 프랑스 건축가 오귀스트 페로 탓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 완전히 폐허로 변한 르 아브르 시를 재건하고자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가 이 재건사업을 맡아 도시 전체를 완전히 바꿔놓은 탓이다. 그럼으로써 그림 속 풍경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되고 말았다. 콘크리트 신화를 믿었던 한 건축가의 야심은 이처럼 원대한 그림 속 풍경을 왜곡하고 비틀고 그것도 부족하여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이번 여행은 이런 패배감으로 시작하고 말았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콘크리트 건축의 대부인 르 꼬르뷔지에와 동시대 인물인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와 그가 재건사업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했던 르 아브르(Le Havre)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인물과 도시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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