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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Mar 17. 2024

영원한 항구 르 아브르

몽생미셸 가는 길 152화

[대문 사진] 르 아브르 바쌩 뒤 꼬메르스(bassin-du-commerce) 풍경


르 아브르(Le Havre)는 우리의 인천과도 같은 북서쪽 바다에 면한 항구 도시다. 프랑스에서 막세이(Marseille) 항구와 함께 전 세계의 항구와 연결되는 물류 운송 최첨단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도 노르망디 지방에서 제일 많다. 이 도시가 프랑스 제일의 항구로 자리 잡은 것은 16세기 초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견인했던 프랑수아 1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의 르네상스 예술에 심취한 프랑수아 1세는 당시 선진 문명이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프랑스에 도입하고자 천재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한 인물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스페인 정복에 실패한 경험을 되살려 퇴색한 내륙의 로마 가도 대신 항로를 개설할 목적으로 대서양 연안 항구 도시를 꿈꾼 인물이었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부흥시킨 가장 프랑스 다운 국왕 프랑수아 1세.


가장 프랑스 다운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수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파리 인근에 퐁텐블로 궁전을 짓고 루아르 강과 세느 강을 오갔다. 퐁텐블로 궁전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궁전 가운데 하나이자 프랑스 고유의 문화예술의 발흥을 위해 획기적인 공헌을 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6세기 초 프랑수아 1세가 지은 퐁텐블로 궁전은 이후로 나폴레옹 때까지 역대 프랑스 국왕들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에 따라 프랑스로 건너와 루아르 강가에 세워진 클로 뤼세(Château du Clos Lucé)에 기거하면서 프랑스 르네상스를 진두 지휘하다 67세의 나이에 운명하고 만다. 프랑스에 체류한 지 딱 3년 만이다. 국왕의 팔에 안겨 눈을 감은 이 천재 예술가가 죽기 전 자신을 보살펴 준 국왕에게 「모나리자」를 기증한 것은 미술사 관련 저술들마다 회자되는 내용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3년간 머물렀던 프랑스 루아르 강가에 위치한 클로 뤼세(Clos Lucé).
국왕 프랑수아 1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도미니크 앵그르 그림, 파리 프티 팔레(Petit Palais) 시립미술관.


일찍부터 선진 문명의 교류에 눈 뜬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역대 어느 국왕보다도 내륙으로 곧장 뻗어 나간 로마 가도 대신 뱃길로 이어진 항구의 중요성을 깨달은 인물이었다. 국왕은 세느 강이 바다에 닿는 하구 습지에 항구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연안 도시가 바로 르 아브르다.


당시 배들이 오가던 세느 강 하구 제일 큰 항구는 세느 강 건너편에 위치한 옹플뢰르(Honfleur)였다. 옹플뢰르는 앞으로 국왕이 거주하는 수도 파리에 소금을 공급하는 창고 구실을 할 당시로서는 아흐흘뢰흐 (Harfleur)와 함께 주요한 어항이자 해양 거점 도시였다.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새로이 항구로 자리 잡은 르 아브르는 발전을 거듭했다. 16세기 초 무역의 성장, 아흐흘뢰흐의 몰락, 영국군의 프랑스 상륙에 대한 두려움으로 국왕은 르 아브르 항구를 건설하고 유지에 힘을 쏟았다. 1517년 10월 8일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아브르 드 그라스(Havre de Grâce) 항구 건설을 위한 헌장에 서명한 뒤, 이 엄청난 사업을 귀용 르 화(Guyon Le Roy) 제독에게 맡겼다. ‘큰 탑(grosse tour)’이라 일컫는 프랑수아 1세 탑(Tour François 1er)이 항만 입구에 세워진 것도 이 시기다.


으젠 부댕이 그린 르 아브르 시청사와 프랑수아 1세 탑, 1852년, 르 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MuMa).


늪지대에 위치한 불리함 이상으로 때마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우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르 아브르 항구는 건재를 과시하며 확장을 거듭했다. 국왕 자신도 1520년 이 항구 도시로 이사하여 르 아브르를 국왕 특화도시로 지정한 것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상징인 도롱뇽이 들어간 문장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문장 하단의 불을 품어내는 도롱뇽은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이다. 아브르(Havre)는 노르만 어로 ‘항구’란 뜻을 지닌 용어에서 유래했다.


이때부터 르 아브르는 프랑스 함대의 집결지 중 한 곳이었고, 저 멀리 북대서양에 위치한 뉴펀들랜드에서 대구 잡이를 하기 위해 떠나는 고기잡이 배들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신대륙으로 나아가는 이동통로였음은 물론 가죽, 설탕, 담배와 같은 미국 산 제품들이 도착하는 무역항 구실을 도맡았다.


앙리 4세 때에 이르러 구교도들과 신교도들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이후로는 구교도들에 의해 쫓겨 신대륙으로 망명길을 떠난 신교도들의 마지막 출항지이기도 했던 르 아브르는 루이 14세가 집권하자마자 추기경 리슐뢰이를 통해 항구의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한번 도약할 기회를 갖는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자 천재 건축가였던 보방(Vauban) 원수가 르 아브르와 아흐흘뢰르 항구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기도 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근본 원인인 국가 재정 파탄을 불러일으킨 루이 15세 때 이르면, 국왕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가 바닷가에 그럴듯한 별장 한 채를 지어달라고 국왕에게 애원하자 루이 15세는 애첩의 소원에 따라 르 아브르를 애첩의 휴양지로 전락시킴으로써 도시 재정은 파탄에 이르고 결국 르 아브르는 그 화려한 명성을 뒤로한 채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노예무역, 담배 공장, 조선소, 무기고, 증권 거래소 설립 등 항구와 도심 변화에 따른 인구 증가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르 아브르 항구는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반란, 폭동이 끊이질 않아 대혁명 이후 유형지로 변모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나폴레옹 1세가 등극하면서 유럽 정벌로 인한 전쟁 확산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대륙 봉쇄에 따른 항구 활동이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르 아브르는 인구마저 감소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세기 인상주의의 발흥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성소가 된 르 아브르는 예술의 성지로 거듭났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로 흘러들었고, 그들은 이곳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이어 나갔다. 모네가 이곳에서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저 유명한 「일출, 해 뜨는 인상」을 그린 건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는 사실이다.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 바닷가 풍경, 1903, 르 아브르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MuMa).


그러나 그것도 잠시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르 아브르는 전쟁의 참화를 비껴갈 수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시에 이 항구 도시는 대서양 장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방어도시였다.


영국 침공을 두려워한 독일군은 1940년 봄 도시를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때 르 아브르 시민들은 식량 부족, 검열, 폭탄 테러, 반 유대주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혹독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레옹 메예르 시장은 유태인이란 죄명으로 공직에서 해임된 채 행방마저 묘연해졌다. 이런 점에서 전쟁 후 르 아브르를 재건한 프랑스 현대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가 반 유대주의 선봉에 선 건축가였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르 아브르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독일군에 대항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활약은 저 빛나는 1944년 6월 6일 ‘D-Day’에 펼쳐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운명은 파국을 면할 수 없었다. 1944년 6월 영국 공군의 르 아브르 시에 대한 첫 공습이 시작된 이래로 같은 해 9월 영국 전폭기에 의한 르 아브르의 폭격이 감행되었다.


1944년부터 1945년 겨울까지 르 아브르 시는 연합군에 의한 132건의 공습을 겪었다. 폭격으로 말미암아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기에 이르렀고, 파리에서 출발하여 루앙을 거쳐 르 아브르에 이르는 기찻길과 함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르 아브르 기차역 역시 전소되고 말았다.


해방을 앞둔 시기에도 철군하는 독일군에 의해 항구 기반 시설마저 파괴되는 바람에 항구에 정박해 있던 350척에 달하는 배들 모두가 수중에 침몰하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중 가장 광범위하면서 위협적인 폭격은 1944년 가을에 일주일 동안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영국 폭격기들은 르 아브르 도심 상공으로 2천 회 이상 출격하여 약 1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도심과 항구에 집중적으로 투하했다. 이 바람에 도시는 초토화되고 건물은 전소되기에 이르렀으며,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여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영국군에 의한 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폐허로 변한 도시, 위키페디아(Wikipédia) 기록 사진.


르 아브르 시에 대한 영국군의 폭격은 전쟁사에서 전대미문의 의혹으로 남아있다. 당시 르 아브르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주력부대는 모두 다 산꼭대기에 주둔해 있었고 방공포 역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독일군 사령부조차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영국군은 도심과 항구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가했느냐 하는 점이다. 군사작전의 미숙, 실수, 과오, 그것이 아니라면 이는 애당초 잘못된 군사 작전이 낳은 비극이 분명했다. 이처럼 지구상에는 인류가 저지른 전쟁의 참상, 즉 적군이 아닌 아군에 의한 피폭과 비극이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것이 전쟁의 이면이자 참극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전쟁의 폭격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르 아브르 천 년의 역사를 고증해주고 있는 그라빌(Graville) 수도원 로마네스크 회랑.


르 아브르는 1944년 9월 12일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1944년 10월 7일 해방된 도시에 들른 드골 장군은 르 아브르 시의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드골 정부 산하 재건 도시 계획부를 통해 르 아브르 시 도시 재건 프로젝트를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에게 일임했다. 이어 1949년 7월 18일 르 아브르 시가 그 어느 도시보다도 ‘파괴를 견뎌낸 영웅주의’에 입각한 도시라 칭송하면서 레종 도뇌르 국가 훈장을 수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건축가 오귀스트 페로에 의해 재건된 르 아브르 시의 모습. 위키페디아(Wikipédia) 기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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