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21화
[대문 사진] 바이유 노트르담 대성당
노르망디 왕국의 국왕이었던 로베르 르 마니피크(탁월한 마니피크)와 무두장이의 딸인 아흘레뜨 사이에서 태어난 기욤은 평생 죽을 때까지 ‘사생아’ 소리를 듣고 살았다. 죽은 뒤에도 역사가들마저 이구동성으로 기욤(윌리엄)을 사생아라 불렀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영국 국왕이었던 기욤(윌리엄)은 따라서 죽는 날까지 ‘정복왕’이란 수식어와 함께 ‘사생아(바타르)’란 별명 아닌 별칭을 감수하고 살아야만 하는 신세였다.
천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사생아 소리를 듣는 기욤은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이 조롱 섞인 말이 듣기 싫어 평생 한 여인하고만 살았다.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을 동시에 지배했던 공작이자 국왕이었던 기욤이 바람피운 일조차 회자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은 기막히다 못해 어리둥절하게까지 만든다.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해 준 조세핀을 죽는 날까지 사랑했던 나폴레옹이란 남자도 최소 네댓 명의 여인이 있었다. 조세핀과 결혼했지만, 나폴레옹을 알기 전 유부녀였던 조세핀이 몸이 이미 망가지는 바람에 나폴레옹과 결혼해서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관계로 후계자를 낳지 못한 조세핀은 늘 이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황제의 후계자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국회로부터 강제 이혼을 당하는 나폴레옹,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합스부르크가의 공주였던 새 여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기는 했으나 결국 워털루 전투를 마지막으로 유럽 연합군에 패퇴하여 쓸쓸히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끌려간 뒤, 거기서 위장병이 도져 위궤양을 앓다가 섬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자신보다 먼저 일찍 세상을 뜬 조세핀만을 떠올렸다.
천 년 전의 기욤은 그러나 한 여인만을 사랑했고 자신보다 먼저 떠난 그 여인만을 그리워하다가 외롭고도 쓸쓸한 전쟁터에서 눈을 감았다. 이 장대한 영웅의 서사시가 수놓아진 자수(刺繡)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캉(Caen)에서 30여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이유(Bayeux)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는 다른 사내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었던 무두장이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새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오동과 로베르라는 두 남아를 낳았다.
이 아버지가 다른 그러나 기욤과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오동이 기욤의 영국 정복 이후에 영국에 사는 아낙네들을 동원하여 자수를 짓게 하여 기욤(윌리엄)의 대서사를 수놓게 하였으니, 그 길이가 70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대형 태피스트리(Tapestry)가 바이유의 <자수 박물관>에 걸려있는 것이다. 이른바 ‘정복왕 기욤의 서사시’란 제목이 붙은 이 대형 자수는 기욤이 태어나 영국을 정복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자수 놓는 법을 배우러 온 모(某) 여대 대학생들의 통역을 맡아 학생들을 데리고 찾아간 바이유의 자수 박물관에는 정복왕 기욤의 서사를 수놓은 자수가 영국의 끈질긴 반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대형 전시실에 보관 진열되어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충격에 빠져 아내에게도 이 태피스트리를 반드시 보여주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벼르다 별러 찾아온 노르망디, 이틀째 되는 날이었기에 공국의 수도 캉은 이미 답사를 마쳤으니 바이유를 찾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햇살이 환한 아침이었다. 무지개가 우리 두 사람을 계속 따라다니다가 마침내 유월의 찬란하고도 눈부신 햇살을 드리운 날, 캉의 숙소를 빠져나와 자동차로 베생(Bessin) 지역의 들판을 가로질러 구릉으로 난 길을 힘차게 달려갔다. 길 끝에는 기욤의 자수가 기다리고 있을 테고, 바이유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을 테고, 물레방아가 도는 오르(Aure) 하천 가의 아늑한 집들이 우리 두 사람을 반겨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