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유의 자수

몽생미셸 가는 길 222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서사를 담은 자수



1077년
자수가 처음으로 전시되다



1077년 7월 14일 오동의 주도로 새로 지은 대성당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 랑프랑크, 기욤, 마틸드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참석했다. 저 유명한 바이유(Bayeux)의 자수가 처음 공개되는 자리였다. 자수는 성당의 중앙 회중석 기둥들에 걸쳐 전시되었다. 당시에는 대 건축물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자수도 매년 7월 초 성유골들의 축제일에 맞춰 계속해서 전시될 참이었다.


수차례 발생한 화마에 목숨을 건진 자수는 개신교도들에 의한 대성당 약탈 중에도 잘 피신해 있었고, 대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파괴의 참혹함 속에도 살아남았으며, 독일 나치의 침탈과 탐욕에도 잘 견뎌냈다. 오늘날 자수는 예전 바이유의 세미나실에 아주 특별한 조치 속에 전시되고 있다. 70미터에 달하는 태피스트리의 길이에 맞게 커다란 유리로 특별 제작된 기다랗게 연결된 전시 공간에 자수가 온전히 보존 전시될 수 있도록 조명마저 희미하게 낮춘 것은 물론이고 적절한 온도 장치 속에 보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1]


이 유명한 자수가 1077년 바이유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회중석에서 전시된 것이 틀림없다.


바이유에 온 목적은 그와 같았다. <태피스트리 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는 대형 자수를 한사코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오직 이날만을 기다려왔던 것이고 아내의 놀라움과 감동마저 기대한 것이었다.


나의 마음을 읽었다면 출발부터 상쾌했을 테지만, 아내의 얼굴은 무슨 일인지 어두운 표정이었다. 간밤에 내가 무슨 단단히 잘못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바이유에 자수 놓는 법을 배우로 온 여대생들을 데리고 돌아다닌 내 꼬락서니가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통역사의 직업이 직업이었던 지라 자수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대학생들이 캉에 체류하는 동안 연수 기간 내내 아이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속 사정은 어디에다 설명해야 하나? 허공을 향해 고개를 돌려도 아내에게 항변할 방법은 마땅치 않아 보였다.


나는 스스로 침묵을 택했다. 아내의 표정을 살피면서 바이유에서의 긴 오후를 어떻게 때워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도중에 결국 아내는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찾는 걸 포기하고 운하 가에 쪼그리고 앉아 한없이 아내를 기다렸다. 랭보의 ‘취한 배’처럼 오르(Aure) 하천에 서글픈 마음 한 조각을 띄워 보내면서 아내와 함께 한 지난밤을 되질 하기도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내는 마침내 모습을 나타냈다.


이 숨바꼭질은 바이유 답사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다 카페에서 휴식을 취할 때 드디어 아내가 결론을 내리듯 잘라 말했다. “앞으로는 여자애들 이야기를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내에게 여자애들 이야기를 해 봤자 본전도 못 찾을 건 뻔한 이치였다. 그렇다고 남자애들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냥 대하는 여자와 아내는 분명 다른 존재다. 아내에게는 더 삼가야 할 것이 천지 빛깔이다. 아내 앞에서 말을 자중하는 것이야말로 아내를 한 여자로서 보다는 한 인격체로 대하는 길이다. 나는 아내가 어렵게 쏟아놓는 이야기의 속뜻까지 미루어 짐작해 봤다.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내게 해야 할 말을 마쳐서 스스로 후련했던지 반갑게 포즈를 취해준 아내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바이유로 오는 차 안에서 이런 긴장과 숨 막힘의 연속이었으니 도착해서도 기분은 영 풀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자수 박물관을 향한 길목으로 나 있는 오르(Aure) 하천의 물레방아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자고 말하고는 묵묵히 포즈를 취한 아내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이 여태껏 남아있다.


앨범 속의 두 장의 사진. 포즈를 취했을 때 과연 아내는 무얼 그려본 걸까?


아직도 설레는 맘속에는 그녀의 처녀 때 인상이 어른거린다. 그녀도 많이 변했다. 상냥하고 명랑하던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묵직함이, 이 엄중함이 그 발랄했던 경쾌함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하지만, 그러나 그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나 역시 묵묵히 그녀를 따라 그녀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이 막중한 책무가 인생의 무거운 과제들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집에 돌아온 날 그녀가 바이유에서 처음으로 포즈를 취한 물레방아가 있는 오르(Aure) 하천 풍경 사진을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에 담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그린 그림은 아내와 나 두 사람의 여행 중의 기억을 소생시켜 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자수 박물관 입구로 들어선다. 크기가 그리 큰 규모가 아니어서 입구가 잘 눈에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차는 주차시키고 걸어서 이동하니까 그리 편할 수가 없다. 마치 가벼운 여행자처럼 인생의 정체 모를 것들이 짓누르는 중압감마저 없다.


입장권을 끊고 박물관 실내로 들어서니 커다란 홀이 나온다. 커다란 홀을 거쳐 자수가 전시되고 있는 오른쪽 방으로 이동한다. 방금 지나온 입구에 걸려있는 화보 사진이 어딘지 낯익다. 전시되고 있는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자수다.


바이유 자수 박물관에 와 있음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안내판.
자수 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걸려있는 포스터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놀람’, ‘충격’이라는 프랑스 어(ÉTONNEMENT)가 인상적이다.
전시되고 있는 자수에 수놓은 서사가 해롤드, 에드워드, 기욤 이렇게 세 사람의 이야기임을 일러주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있는 전시실로 이어지는 진입로.


전시실에는 엄청난 크기의 태피스트리가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내가 컴컴하다 보니 견디기가 어려울 만큼 침침하다. 자수를 제대로 보려면 실내를 어둡게 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아내가 뒤처졌다. 아내는 원래 찬찬히 관람하기를 좋아하기에 혼자서 앞 달려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내가 좋아하는 친구 내외는 부부가 꼭 붙어서 관람하기를 즐긴다. 또 다른 친구는 부부가 따로따로 떨어져서 관람해 버릇한다. 나는 일부러 아내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었다. 그놈의 여자애들 이야기 때문에.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아내를 찾으러 처음으로 되돌아왔지만 아내는 채 반도 구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아무 말이 없다. 속만 타들어갈 뿐이다.


마침내 전시실을 빠져나오자마자 한마디 툭 던진 아내의 관람평도 공명으로 귓가를 맴돌았다. 지금도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 그 순간 나는 어떤 강박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전시실을 빠져나와 기념품 등속을 파는 장소로 이동했다. 이른바 프랑스어로 부티크(boutique)란 곳에서 이것저것 골랐으나 그녀는 맘이 동하지 않을뿐더러 전혀 내키지도 않는다는 표정이다. 결국 전시 중인 태피스트리를 사진으로 찍어 인쇄한 종이 복제품 <자수첩> 한 권을 사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끄물끄물한 표정을 지었다. 맘도 심란해서 자꾸만 꾸물꾸물 해져만 갔다. 그놈의 여자애들 이야기를 해서는…….


상단 오른쪽 부분 천에 씌어진 숫자 39는 정복왕 기욤의 서사에 나오는 서른아홉 번째 장면을 뜻한다.



‘정복왕 이야기’의 기원



‘정복왕 이야기(Telle du Conques)’는 ‘마틸드 왕비의 태피스트리’란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태피스트리가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서 자수(刺繡)다. 누가 11세기에 이 대작을 주문했을까? 누가 무슨 이유로 자수를 구상했을까? 누가 그것을 완성했을까?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직물에 수를 놓았을까? 끝부분은 소실된 것일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확실한 답은 찾을 수가 없다.


태피스트리(자수)는 영국에 있는 직물에 수를 놓는 공방에서 제작되었다. 아마도 켄트 지방의 주도인 캔터베리일 것이 확실하다. 이를 주문한 사람이 당시 켄트의 백작이었던 오동이고, 바이유의 주교 이름이 태피스트리에 그것도 세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는 걸 봐서 확실하다. [2]


디자인을 구상한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의 수사였으며, 그는 11세기 초에 캔터베리에서 제작된 수사본(手寫本)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태피스트리엔 라틴어로 된 전설이 담겨 있고, 라틴어에 앵글로 색슨의 초기 언어 형태인 영국식 어휘가 뒤섞여 있다.


피에르 부에에 따르면, 1067년부터 1069년 사이에 직물에 수를 놓아 태피스트리를 완성했다. 그는 태피스트리에서 해롤드가 항상 인자하고 호의적인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기욤이 적들과의 화해가 얼마나 헛되고 공허한 지를 깨달은 1070년, 모든 반대파들을 인정사정없이 일거에 쓸어버리기 전이었던 시기에 해롤드가 기욤에 대항하는 협력자들을 구하려고 발버둥 쳤던 점을 여실히 증거 해주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아마포로 제작된 천의 폭은 50센티미터이고 길이는 68.3미터(약 70미터)에 이른다. 양털에서 뽑은 여덟 개의 색실을 사용하여 바늘로 일일이 수를 놓아 완성하였다. 밑바탕의 천은 아홉 개의 조각으로 불규칙하게 나뉘어 있는데, 이는 한 땀 한 땀 바늘로 꿰매 이어 붙인 것이다.


소실된 끝부분엔 1066년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첫 장면이 에드워드가 손에 왕홀을 들고 왕위에 앉아 있고, 해롤드가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면도 있는 반면, 기욤의 대관식 장면은 태피스트리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구성에 따르자면 기욤의 대관식 장면이 마지막 소실된 부분에 그려져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대목이다. [3]



과연 바이유의 태피스트리는
배반자의 이야기일까?



이 ‘선전용 필름’은 천의 중심 부분을 이루고 있다. 바탕천의 윗부분과 아래쪽 가장자리엔 이상야릇한 생김새를 지닌 짐승들과 일상생활의 장면들이 수놓아진 띠가 기다랗게 이어지고 있다.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의 구성은 연속되는 장면으로 분할하고 있는데, 중간에 장면이 바뀌고 있음을 강조한 ‘HIC’ 또는 ‘VBI’(여기와 저기란 뜻), 탑, 나무 등에 의해서 사건이 나뉜다. 일련의 사건을 구성한 각각의 장면 전개는 마치 영화와 같은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연사가 결정적인 순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 이를 앞에서 지켜보는 청중들은 금방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는 이치와 같다.


태피스트리가 군사 원정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한 폭의 거대한 프레스코화라는 점만큼은 명백하다. 그러나 태피스트리는 주로 성유골 위에 손을 얹고 거짓 맹세를 한 참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을 벌인 인물을 연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자에게는 이 인물만큼 중대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태피스트리가 입증해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만고의 전지전능한 하느님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4]








[1] 미셀 우흐께/질르 피바흐/장-프랑수아 세이에흐 공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복왕 기욤』, 오렢(OREP) 출판사, 파리.


[2] 기욤의 형제인 오동은 바이유의 주교이자, 영국 정복 이후엔 캔터베리 주교가 되었다.


[3] 위의 책 참조.


[4] 같은 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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