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웅에 대한 심취

몽생미셸 가는 길 22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기욤이 태어난 활래즈(Falaise)에 세워진 정복왕의 기마상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이 모처럼의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중세 영웅 정복왕 기욤(윌리엄)은 죽기 직전 자신의 어떤 모습을 그려봤을까 하는 것이었다. 기욤을 언급하고 있는 역사서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시대가 낳은 중세 영웅에 대한 자화자찬만이 그득한 터라 여기에서 그것 모두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기욤은 마지막 순간에 쓸쓸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고독한 군주인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법하다.


나는 그것이 한 영웅의 태생에 근거한 빈약한 감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부조리 연극 극작가들이 모두 그려낸 부조리한 영웅들은 모두 그와 같이 도래하지 않을 고도(Godot)를 기다리며 죽어간다. 심지어는 근대사의 마지막 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그렇게 죽어갔다.


하물며 나라는 평범한 존재는 어떠할 것인가? 중세라는 시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아주 초라한 나라는 속인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영혼쯤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실존적 명제는 항상 ‘구원’을 앞세운 종교적 논리에 휘말려 들어 결국 패가망신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할 따름이다. 뿌리 뽑히고 억눌린 자의 한숨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길밖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도 다른 구원의 방식은 존재했다. 그게 바로 모성(母聖)에 대한 어쩔 도리가 없는 인정이었다.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이었던 베르나르도가 외쳤던 어머니의 성스러움의 실체는 다름 아닌 성모 마리아였다. 인격적 존재인 마리아에게 성인의 품격을 덧씌운 것이다. 어머니는 한없이 그윽하고 화해로운 존재임을 그 살벌한 중세 권력의 다툼 속에서 쓸쓸하게 퇴장한 베르나르도는 깨달았던 것이다.


클레르보 아빠스(‘수도원장’이란 뜻) 베르나르도! 내 가톨릭 영세명 역시 베르나르도다. 일찍이 학문에 정진했던 베르나르도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식솔들을 이끌고 부르고뉴 지방에 수도원을 세우고 클레르보 수도원장이 된 인물이다. 십자군 원정을 고취하는 명연설을 한 장본인으로 소박하고 검소하고 절제할 줄 아는 수도원, 즉 시토회를 부흥시킨 성직자로 유명하다.


기욤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르 마니피크와 무두장이의 딸이었던 어머니 아흘레뜨 사이에서 태어난 기욤은 손 아래로 아에리(Aélis)라는 누이동생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책에는 기욤의 누이에 대한 행방만큼은 묘연하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드나들던 시절, 나는 그렇듯 베르나르도 성인에게 감화되어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 꽃 피는 사월 초파일, 봄꽃 흐드러지게 핀 따사로운 날에 목숨을 끊은 어린 누이에 대한 애정이 피를 끓게 했던 내게는 각성과 깨달음의 싯다르타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유일무이한 절대자 창조주 하느님(Dieu)께 내 모두를 맡기리라는 믿음으로 옮겨갔다. 그 영성의 길을 처음 다잡아준 이가 대부이신 시인 구상 선생이셨고, 선생은 프랑스로 향하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쥐여주며 빛나는 삶과 글쓰기를 당부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와서도 나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 길고 긴 방황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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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영웅이 내게 고마운 이유는 바로 그렇듯 중단된 글쓰기를 다시 이어가게 만들어준 인물이 정복왕 기욤이라는 데 있다. 나는 그가 고마웠다. 중세 영웅인 그가 21세기 인류에게조차 부활에의 희망을 꽃피우게 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거침없이 성가신 주제만을 다뤄가기 시작했다. 프랑스라는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천 년 전 이들의 역사에 심취해 노르망디를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틈만 나면 노르망디로 내달렸고 역사 유적지에서 폐사지에서 박물관에서 골목길 허름한 부키니스트(헌 책방)에서 내 나름의 시간을 유영해 갔다. 그러고 난 뒤 마침내 이 긴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제 앞에는 몽생미셸(Le Mont Saint Michel)을 가리키는 여덟 장의 지도가 놓여있습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여 모두 몽생미셸을 향한 것이 마냥 재밌기만 합니다.


첫 번째 지도는 육각형 모양의 프랑스 전도에 노르망디 지방을 푸르고 굵게 원으로 표시한 지도입니다. 지도는 우리말로 ‘수도원 섬’이라 불리는 몽생미셸이 프랑스 대서양 북서쪽 바닷가에 위치해 있음을 일러줍니다.


프랑스는 총 26개의 광역단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광역단체는 프랑스 어로 레지옹(Région)이라 부릅니다. 파리를 포함하여 수도권을 가리키는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를 비롯하여 지중해 섬인 코르스(코르시카)까지 한반도의 2.5배에 이르는 드넓은 국토를 아우르고 있죠. 특이하게도 지도는 노르망디를 높은 쪽 노르망디(Haute Normandie)와 낮은 쪽 노르망디(Basse Normandie)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지도는 한정하여 노르망디 지방만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노르망디는 센마리팀, 위레, 칼바도스, 오흔느, 망슈 이 다섯 지역으로 나뉩니다. 지도상에서 몽생미셸은 ‘소맷자락’이란 뜻을 지닌 대서양가 망슈(Manche) 지역 끝단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행정구역 단위는 시(코뮌), 도(데파르트망), 광역단체인 지방(레지옹)으로 분류합니다. 노르망디는 레지옹에 속하고, 망슈는 도, 몽생미셸은 코뮌에 속하죠.


망슈의 도청 소재지는 생로(Saint-Lô)인데. 이웃의 캉(Caen)처럼 제2차 세계대전 시 불바다가 된 아픈 상처를 지닌 도시입니다. 이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은 그렇듯 ‘아픔’입니다.


수없는 전란을 치르고 겪은 지역을 돌아볼 때마다 전쟁의 참상에서 살아남은 교회들과 주민들, 그리고 어느 시대인지 아련하기만 한 옛 건물들에게서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경험하고는 합니다. 비록 여행자의 감회이긴 하나 오래된 정원수나 가로수에게서조차 경외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세 번째 지도는 노르망디 해안에서 이루어진 상륙작전을 간명하게 보여줍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사건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 영국, 캐나다가 주축이 되어 꺄부르 해안으로부터 아호망슈를 거쳐 생 메흐 에글리즈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바닷가에서 펼쳐진 전투를 통째로 아우르는 말입니다. 인근의 캉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 사령부조차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고도 놀라운 작전으로 펼쳐진 20세기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이었습니다.


프랑스 수도 파리를 탈환하는 일대 쾌거를 이루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서유럽 전선을 반 토막 내는 경이로운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이로써 독일군은 패퇴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주범 히틀러는 연합군의 포위 공격 속에 베를린 지하 참호에서 자살함으로써 지긋지긋했던 제2차 세계대전도 막을 고합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대서양가에 위치한 노르망디 해안을 유타, 오마하, 골드, 쥬노, 스워드 등 영문 이름을 딴 유명한 백사장 비치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걸출한 전쟁 영웅들 또한 배출해 냈습니다.


전쟁은 가끔씩 미화되긴 하지만 참혹한 것일 따름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 가운데 전쟁만 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서양가에서 연합군 독일군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마을들이 폭격으로 사라져 갔습니까?


칼바도스 지역의 보석과도 같은 도시 캉(Caen)이나 바이유(Bayeux)를 찾을 때마다 저는 그처럼 무너져 내린 교회 천장과 폐허가 되다시피 한 중세 요새(성채)에서 전쟁의 참상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글의 서두에서 미리 밝혀두는 것이지만, 처음 『몽생미셸 가는 길』이란 글을 구상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30년간을 오간 노르망디의 미로 같은 길에서 만난 보석과도 같이 찬란한 마을들 때문이었습니다.


몽생미셸로 가는 길은 그래서 더 아름다웠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조차 살아남은 마을들, 그리고 마을들을 여태껏 지켜가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은 제 오래된 염원과도 같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몽생미셸 가는 길에 들른 바이유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오르 하천에 걸쳐있는 중세풍의 돌집들, 창틀마다 붉은 제라늄이 피어있는 오솔길을 지나면 바이유의 명소 <자수 박물관>이 나타나고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길이 70미터에 달하는 태피스트리에는 노르망디 왕국을 건설한 정복왕 기욤(영어 표기로 ‘윌리엄’으로 알려진 인물)이 이룬 승리의 대서사시가 수놓아져 있습니다.


하천 너머 시청사 옆에 자리 잡은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대성당 노트르담은 종교개혁 시기에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프랑스 대혁명 시기엔 분노한 백성들에게 성당 곳곳이 파괴되는 참화를 빚었지만, 이후에 이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뜻을 지닌 많은 이들이 뜻을 모아 대성당을 복원하고 개축하는 바람에 아직도 바이유를 지키는 주교좌성당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는데, 그 엄청난 높이도 높이지만 거대한 둥근 천장을 올려다보노라면 종교적 신비가 무엇인지 짐작되기도 합니다. 저 멀리 고운 바닷가 모래사장엔 바이킹들의 거대한 족적마저 감춰져 있을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내내 이런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기를 희망했습니다. 수없이 오간 길이긴 하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도 되찾는 기쁨이 배가하기를 또한 염원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오래된 질문으로부터 저 또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 글이 단순히 여행지에 관한 기록으로만 남지 않을까 적잖이 불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쓸 것인지를 구상하면서 끊임없이 떠올랐던 풍광들은 그저 단순히 찬란한 것들만이 아니었기에, 저는 주저 없이 글을 시작하고 말았습니다.


스쳐 지나간 길들에서 보았던 풀들 하나하나에게나 이름 모를 잡초들에게조차 생명의 저 숭고한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모처럼 교회의 돌기둥 하나둘씩 제게 커다란 상징으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과 마주했던 것이죠.


저는 그 이야기들을 마침내 글로 옮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글이 성공적으로 완성될지는 미지수이긴 하나 30년이란 기나긴 시간 동안 마주치고 바라보고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꿈꿨던 상징들이 제게 말을 건네는 신비, 자연과 건축의 광대한 울림을 적어나가고자 그토록 고심했던 것입니다.” [1]


바이유 노트르담 대성당 뒤뜰의 플라타너스. 내 인생 역시 저 버짐나무처럼 무수한 가지를 뻗어 올린 거대한 세계여야만 했다.







[1] 연재 중인 여행에세이 『몽생미셸 가는 길』 시작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