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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말미에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94화

by 오래된 타자기


말솜씨가 뛰어나든지,
아니면 어휘의 목을 비틀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던지.



이는 마네의 행보를 두고 폴 베를렌느가 감탄한 나머지 써 내려간 시의 한 구절이다. 말솜씨를 꼭 시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솜씨로 바꿔 치기 해도 별 문제가 없다. 뉘앙스조차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마네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완전히 결별한 화가다. 더군다나 그 역시도 몸담고 있는 예술적 전통과 급격한 절연을 시도한 흔적 또한 역력하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보다 앞서 시대를 뛰어넘은 선구적이고도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스스로 본받고자 부단히 노력한 것을 통해 선명히 확인된다. 마네보다 몇 년 앞서 진보적 예술 활동을 펼친 바 있는 들라크루아나 쿠르베는 그 한 예에 불과하다.


만일 시에 견주어본다면, 마네는 시인인 폴 베를렌느와 같은 존재다. 당대의 문학적 관점에서 본다 치더라도 플로베르 유의 소설가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표현의 온전한 자유를 극명하게 표출한 경우에 해당한다.


간결하고도 명쾌한 표현을 추구하고 일화적인 요소마저 거부한 채, 사물이든 인물이든 동작까지도 포착하여 이를 절묘하게 묘사한 것은, 게다가 속도감까지 표현한 것은 지극히 칙칙하고도 음울한 회화의 세계를 활짝 열어젖히고 그 어둠에 화려한 빛을 투사한 것과 다름 아니다. 더하여 진정으로 예술을 통한 진실된 표현을 획득하고자 한 노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예술에 대한 진정성, 혹은 진정한 태도야말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다. “바라본 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을뿐더러 생각한 바대로 말하는 것처럼 값진 일도 없다. 마네에게 있어서 타고난 재주란 곧 올곧은 신념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마네의 실제 모습에 관해서 만큼은 알려진 것이 전무하다. 그가 부유했다거나, 한시도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거나, 무람없는 말투로 항상 명쾌하게 대화를 이끌어가곤 했다는 점 이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이처럼 전례가 없는, 알려지지 않은 마네의 삶에 대한 조명은 그가 살던 시·공간을 화려하게 밝혀준다. 마네가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애정을 갖고 대했던 여인들 모두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경우처럼 아주 예외적이고도 특별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마네의 그림은 이처럼 이야깃거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차고 흘러넘친다. 솔레르스는 이러한 마네를 아주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직관으로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직관에 따른 판단은 대개가 다 주효했다. 마네의 삶이나 작품 할 것 없이 우리가 마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애당초 잘못된 관점에서 마네의 삶과 작품을 조명한 탓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네가 살아있을 당시 그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관점에 여전히 머물러있는 상태에서 마네 자체를 몰이해한 탓일 수도 있다. 사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마네에 대한 평판이나 추문을 확대 재생산하는 짓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와 같이 마네를 과소평가하는 건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젠 정당히 마네를 재평가해야만 한다. 마네의 예술은 20세기 예술을 활짝 열어젖힌 등댓불이자 그 전조에 해당한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마네를 빼놓고 마티스와 베이컨을 아우르면서 피카소에서 키에페에 이르는 20세기 예술을 논할 수는 없다. 그처럼 마네가 없었다면, 20세기 예술을 견인한 이들 화가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네에 대한 오해가 시작된 지점에는 이처럼 마네를 잘못 이해한 데서 출발한다. 그의 재능이 촉발시킨 장르의 폭넓음과 그 본질에 대해 사람들은 늘 경멸적인 태도로 반응한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마네가 당대의 화가들에게 반향을 끼친 바를 오도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마네의 예술적 작업이 당대의 화가들에게 믿기 어려울 만큼 영향을 끼치고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잘못 평가한 부분 또한 없지 않다.


1970년대에 와서 앙드레 말로가 “「올랭피아」와 함께 현대 예술이 시작되었다”고 말한 것도 알고 보면, 그 모든 난제에도 불구하고 마네와 함께 시선의 혁명이 완성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일반 대중이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에는 자그마치 5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마네의 작품을 단 한 차례만 일별 해봐도 그와 같은 사실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네의 유화작품을 제대로 심사숙고하여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 역시 아직껏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마네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완성된 상궤에서 벗어난 작품의 양상을 일일이 따져본다는 것 자체가 난감한 일이기도 하다. 마네의 작품을 평가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작품에 두드러진 범상치 않은 주제나 변별적 특징 또한 극도로 흥분한 지각(또는 감각) 과잉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까지 결코 본(일어난) 적이 없는 경탄을 금할 길이 없는 예술의 결정체”라고 말라르메는 마네 사후에 처음 이뤄진 전시회에서 ‘그만의 독특한’ 회화예술에 대해 표명하고 있다.


앙드레 말로 이전에도 마네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화가라 할 수 있는 고갱 역시 “회화예술은 마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한 어조로. 오늘날에 와서 본다면 고갱의 이러한 태도는 조금은 과격하면서도 극단적인 표명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당시에 마네를 추종했던 예술가들처럼 고갱 역시도 마네에 대해 솔직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명백하다. 모두가 그처럼 마네를 본받고자 했으며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앙드레 말로에 의해 ‘현대적’이란 수식어가 덧붙여진 것도 알고 보면 마네의 작품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란 걸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네 없이는 인상주의도 없다. 마네를 추종한 혁신적인 예술가들 가운데 세잔을 능가할 만한 화가도 없을 것이다. 루오나 보나르, 뷔야흐의 혁신적인 예술 또한 마네를 답습했기는 마찬가지다. 브라크, 드 스타엘, 발튀스는 물론이고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가 마네를 답습했다. 마네에게 가장 빚진 화가를 예로 든다면 마티스일 것이다. 다른 화가들조차도 그들의 작품에서 마네의 특징을 답습한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전시실에 걸려있는 마네의 작품을 금방 알아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네의 작품은 마치 도장을 새겨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무슨 특징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의 작품과 구별되는 어떤 변별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마네의 작품은 그처럼 강렬하게 시선을 끈다. 관학풍의 그림들이 전시실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한 탓에 마네의 그림은 한쪽 구석 음습할 뿐만 아니라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할지라도 누구나가 마네의 그림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마네의 그림은 이처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의 그림을 알고 있을 만큼 친숙하다.


마네는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다. 한 시대를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가 그린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문제작들만을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다.


카드의 패를 거꾸로 뒤집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네가 시도한 회화적 돌발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마네가 상상을 통해 떠올린 장면이 아니라 화가가 직접 눈으로 바라본 장면이면서 또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이자 사물들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마네가 그린 매춘부들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마네가 몸 파는 여인들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네는 창녀들만 그린 게 아니라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기 위해 포즈를 취한 인물 역시 화폭에 담았다. 천사들에 둘러싸여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이 된 인물 역시 매춘부나 매한가지로 동시대의 옷차림을 한 현대적인 인물로서 아틀리에에 도착한 뒤에 화가의 요구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포즈를 취한 실제 인물이다. 마네의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처럼 실제 존재하던 인물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화폭 속에서 그들의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리듯 마네와 동시대를 산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마네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은 프랑스가 오직 공식적인 예술만 후원하던 시기였다. 국가가 예술을 간섭하고 나선 이때에 오직 관전인 미술전람회(le Salon artistique)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제도화된 예술만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이를 주관한 곳이 바로 보자르였고, 미술행정은 그야말로 관료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기관인 조형예술부는 예술가들을 강제하고 불온하다 싶은 작품들은 수시로 검열했다. 모든 것이 권력으로 좌지우지되던 시대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마네는 이에 반기를 든 진정한 예술가였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오펜바흐처럼 마네 역시 독창성을 위한 방편으로 기존의 작품들을 섭렵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오늘날 그 이름이 널리 통용될 정도로 누구나가 알고 있는 캉캉 곡을 자신의 작품에 독점적으로 적용한 작곡가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마네는 마치 신들린 듯 기존의 고상한 유형에 현대적인 저속한 유형을 강력히 접합시키면서 결합시켜 나간 보기 드문 화가였다. 이 같은 창의성은 결국 새로운 독창적 세계를 구현하게 만든 동력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모두가 이에 화답하는 예술의 새로운 장르까지도 개척하게 만들었다.


신성모독 또한 마네의 예술이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로부터 과거와 현재가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극적인 예술의 역동성마저 발생했다.


과연 어느 누구도 공식 예술에 있어서 체계화된 회화 장르를 분쇄하고자 과감하게 시도한 이는 없었다. 마네 이전에 그 누구도 회화의 장르를 자유롭게 오고 간 이가 없었던 것처럼.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부터 「올랭피아」를 거쳐 「튈르리 정원에서의 음악회」에 이르기까지 전례가 없는 예술의 독창성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회화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는 독특한 면모마저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가 그린 정물화나, 풍경화, 인물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역사화의 묘혈을 파헤치고 그 어두컴컴한 굴헝 속을 경쾌하게 활보하기까지 했다. 관학풍의 그림이 판치는 예술판에 난장을 부린 마네의 기발함은 제도화된 공식 예술을 넘어서는 혁명적 동력에서 추인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부르주아였던 자신의 독특한 신분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오늘날 우리는 마네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회화의 전체적 총합을 통해 마네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여전히 거부하는데 집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직도 마네의 작품을 인물화나 역사화 또는 정물화 등과 같은 장르별로 세분하는 일에 급급할 뿐이다.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신화적 구성을 차용한 현대 회화이자 장르화이면서 동시에 인물화이기도 하고 야외에서 그린 풍경화이면서 게다가 극 중의 대화를 다룬 그림이기도 하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3.


세부적인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친 기교마저 마네는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근법에 따른 사실적 묘사대신 평탄한 화면 구성을 고집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정면으로 쏟아지는 빛은 형상의 두드러짐을 감추고 관념이 제거된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효과만을 재생할 뿐이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매달렸던 관전인 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한 대작들에게서 보이는 그리스적이면서 신화적이고 호전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마네의 그림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한 묘사로 말미암아 전혀 지루한 감을 주지 않는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에서 볼 수 있듯, 노골적인 사실적인 묘사를 포기한 대신 실제보다 더 그럴듯한 표정이나 분위기를 획득하고 있는 것도 마네의 그림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인이다. 마네의 그림에서 장식적 요소나 수사적인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올랭피아(Olympia)」, 186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스캔들을 일으킨 것에 대해 스스로 놀랐을 뿐만 아니라 이를 아주 불미스럽게 생각했다. 마네는 스캔들이 될만한 본질이나 내용을 일부러 표현하거나 묘사함으로써 작품을 통해 스캔들을 일으키고자 시도한 적이 결코 없었다. 설사 마네가 저속하고도 고상한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심미적이지 못한 온갖 천박하고도 상스러운 요소들을 다 동원하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찌 되었든 마네가 그린 그림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풀밭의 축제일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 알랑대는 상스러운 장면을 담은 것이면서 동시에 가볍게 처신하는 바람기 많은 여자의 표상을 다룬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신의 프시케 앞에서 얼굴에 분칠을 하기까지 한 저속한 장면을 그것도 역사화에 필적할 만한 형태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저속하고도 경박한 주제들이 마네에 의해서 만큼은 대단히 의미심장할 뿐만 아니라 고상하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당연히 이런 주제가 세간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올랭피아」만 보더라도 그림 속의 여인이 너무도 추한 여자의 전형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라면서 아주 못마땅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올랭피아」란 드라마가 고안된 것이란 건 당연하다. 그것도 화가에 의해 직접 고안된 것이란 점은 명백하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을 화가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늘 화가가 대면하면서 지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화가가 감동받은 바 있는 그 같은 류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은 자명해진다. 또한 이러한 주제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주제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 역시 타당할 것이다.


마네는 밋밋한 색조들을 통한 기법을 구사하기까지 했다. 전통적인 화법에 따르면, 빛은 왼쪽 위쪽에서 몸을 향해 쏟아지게 마련이다. 마네는 정면으로 내리퍼붓는 빛을 흐트러뜨리고 전체적으로 밋밋한 분위기를 띠게 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광선 대신 직접 고안하고 설치한 아틀리에 조명을 이용하기도 했다.


마네는 서로 다른 장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완벽하게 고착화된 장르상의 벽을 넘어선 보기 드문 화가였다. 이런 점에서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모나리자」 다음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다소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공공연하게 일반 대중의 입에 오르내린 작품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 할 수 있다. 마네처럼 일방적으로 증오에 찬 비난을 당하고, 일반 대중의 입살에 오르내리면서 기이하게도 망신을 당한 화가도 없을 것이다.


마네에게 퍼부어진 온갖 힐난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짓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예술 비평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늘어놓은 이야기들은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달랐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들이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을까? 대체 눈으로 보고 손에 쥔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솔레르스는 마네의 그림들을 통해 그들이 읽어낸 것은 등장인물들 간의 ‘사회 구조들’이라고 간명하게 풀이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마네는 스스로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벼르고 벼르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완성해 간 것이다. 흔히 마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의 골자를 뜯어보면, 세계를 온전히 바라보고자 한 그만의 독특한 시선이 어떻게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마네가 현대적인 삶의 양상을 그것도 인물의 실물 크기로 그렸다는 건 그리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다. 실물 크기라! 그런 크기로 그릴 수 있는 건 단지 로마인들의 영화를 묘사할 때만이 가능했을 따름이다. 네로와 같은. 하지만 마네는 막시밀리언···을 그처럼 큰 크기로 그렸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막시밀리언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 1867. [1]


예술사에 있어서 최초로 낭만주의를 표방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빅토르 위고야말로 가장 탁월한 화가라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 또한 훌륭한 음악가다. 고티에의 그림 솜씨도 만만치가 않다. 이들 각자의 귀에 앵그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린다. 마네와 연이 다은 그들 모두가 음악광들이다.


그들은 매주 그들의 거실에서 모임을 갖고 진짜로 음악을 연주한다. 그처럼 과격하고 난폭한 이 시대는 모든 장르를 뒤섞어버리고, 예술을 서로 교차시키며, 모든 것으로 하여금 보들레르가 여간 소중히 여겨 마지않던 서로 상응(Correspondances) 해가도록 만든다.



내음과 색채와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 도다.

- 샤를 보들레르



신파극에 적의를 품은 건 사실이지만 마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극 중 한복판에 뛰어든다. 시민의 한 인격체로서 정치적 사건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절감하고 정치성이 짙은 역사화마저 제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마네가 완성한 작품이 「케아르사르쥬 해전」으로부터 「막시밀리언의 처형」에 이르는 정치성이 농후한 다수의 작품들이다(각각 4점 이상씩 그림을 그렸다).


이 와중에도 감베타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를 염원하는 것을 한시도 저버린 적이 없다. 마네는 「졸라」뿐만 아니라 「클레망소」, 「로슈포흐」의 인물화를 그린 것을 비롯하여 다수의 파리 코뮌을 다룬 「바리케이드들」까지 그림으로 남겼다. 1879년 신체상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자 전신에 마비 증세가 시작되어 육체적으로 일대 타격을 입기도 했다. 1879년에 그린 「팔레트를 든 자화상」에서 보듯 이후로 마네는 늘 왼손으로 붓을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네가 1879년에 그린 「팔레트를 든 자화상(Autoportrait à la palette)」.


수많은 이들 모두가 자신을 비열하다 여기고 비난을 쏟아붓다 못해 욕설까지 퍼부어대면서 심지어는 자신을 조롱하고 나섰지만(오라! 마네 씨에게 허세를 부리다 못해 그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기까지 한 이들은 아둔한 자들이었을 뿐이다!), 마네는 그들의 비겁한 공격에 백주 대낮에조차 스스로 몸을 숨겨야만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들과 맞설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완강하게 이들에게 저항하면서 스스로의 독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렇다 해서 마네가 전위예술운동에 몸소 뛰어들고 스스로 저주받은 예술가로 남기를 바랐던 건 아니다. 마네는 자신의 작품이 처음으로 사회적 충격을 안겨준 뒤부터 체계적으로 대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네는 온전히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뜻밖의 예술작품을 창조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예술로서 어떤 사회적 충격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남들보다 앞서 나갔을 따름이다. 물론 야외에서 그것도 피크닉을 즐기는 상황에서 알몸을 한 여인을 그렸다는 건 그 자체로 부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폭탄과 같은 위력을 지닌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전경에 자리한 여인은 고전적인 원근법에 따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색이 없지 않다. 게다가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봐도 어울리지 않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마네는 일부러 옷을 벗은 여인을 그리고자 작정한 것인가 아니면 전혀 고의성이 없는 것인가? 하지만 마네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네는 그와 같은 표현이 진실여부에 따라 진정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마네가 상탄해 마지않는 것들을 무가치하다고 여겨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마네는 회화를 통해 침묵에 다가가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그는 그림을 통하여 무얼 설명하거나 들려주려 하지 않는다. 마네는 그에 대한 세간의 비난에 대해 그 무엇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그림에 매달리며 한 작품씩 완성해 갔다. 마치 플로베르처럼 마네 역시 리얼리스트이자 동시에 형식주의자였던 셈이다.


마네의 작품들에서 받는 또 다른 충격은 그림 속에 함께 어울린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들 간의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인간관계의 부재에 있다. 「발코니」도 그렇거니와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을 그린 작품들도 마찬가지고 카페 풍경을 담은 그림들에서도 함께 어울린 이들의 석연치 않은 인간관계가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인간 상호 간의 석연치 않은 인간관계에 관한 질문은 정당하게도 마네가 요술을 부리듯, 서로 관련 없는 인물들을 배합하여 구성했다는 점에서 제기되는 의문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기 있음으로 해서 존재한다. 그들은 마치 그들 각자가 혼자 있는 것처럼 타인들을 전혀 도외시한 표정들이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실제 혼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을 훑어보듯이 쳐다본다. 경멸에 찬 시선으로. 올랭피아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는 빅토린느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는 관객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면서 남성 우월주의가 부른 남성 지배 사회에 직격탄을 날린다. 그녀는 그녀를 바라보는 자를 참으로 난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기분마저 들게 만든다. 하기는 예술사를 통틀어 어떤 인물화가 관객들을 바라보지 않은 경우가 있겠는가 마는. 그렇다. 하지만 마네에게 있어서는 경우마저 다르다.


마네가 형식적 실험과 함께 색채 유희와 미뤄두었던 과제들을 해치우는 와중에 청중은 학생들 한가운데 벌거벗은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 가리켜 순수한 사회적 환타즘(fantasme social)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네는 시치미 떼고 지켜보고 있던 청중마저 내쫓아버린다.


남자와 여자 간에, 부르주아 중산층과 서민 간에는 끔찍한 사회적 관계가 체계화된 탓이다. 예술을 통해 사회 문제까지 다루고자 했던 화가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뒤엉켜버린 사회적 현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시각은 과연 뭘까?


이처럼 문학적인 견지에서 고찰해 보아도 당대의 시인들의 작품들보다도 더 앞서갔던 그의 그림들은 보들레르와 가까운 사이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이상으로 상징주의의 진정한 폭발력을 지닌 더 진보적인 작품들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네의 작품들은 베를렌느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랭보도 마찬가지이며, 말라르메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 시인들이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네의 소중한 친구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마네의 삶과 예술의 드라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렇기에 마네의 작품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의 삶과 예술이 어떠한 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마네에게 적이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마네의 회화예술 역시 이를 비난하고 경멸해 마지않았던 적들조차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마네의 예술은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붓질이 지극히 방만해 보일지라도 어디까지나 그의 붓질 하나하나는 짜임새 있는 예술적 구성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네의 예술이 저 멀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당대 예술의 침체현상에 주목한다면, 참으로 더디게 예술적 진보가 이뤄지고 있던 상황에서 마네야말로 미술사에 길이 남을 가장 탁월한 예술적 혁명을 이룩한 장본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더는 존재해서는 안 될 제도화된 예술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위기를 타파하고 혁신한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이상으로 마네는 스스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펼치고자 노력하였으며, 스스로 현대적인 화풍을 구현하기를 꿈꾼 화가였다. 그는 어떠한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어떠한 유파를 만들거나 이끈 적이 없는 화가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스스로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뒤섞여 예술활동을 펼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름하여 훗날 인상파 화가들이라 불릴 이들과 한데 연합하여 그룹을 이루는 일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서클을 만들거나 그에 가담하는 일조차 없었다. 홀로 고독하게 그 어느 누구와 연대함이 없이 작품활동을 펼친 마네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였다.


또한 마네는 가능한 가장 간결한 표현을 추구하고자 늘 노력하였으며, 행동하는 양심에 따라 모든 사회 문제에 반사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리더로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솔선수범했다. 더하여 오직 독자들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을 주고자 노력했을 따름이다.


마네의 새로운 예술적 표현은 순간 전통적인 화법에 잠시 젖어있었다 할지라도 스스로 이를 넘어서고자 한 자발적인 의도에 따른 것이었으며, 동시에 재빠른 변화를 보였고, 또한 즉각적이었던 점도 특기해야만 할 것이다. 마네는 그림 그리는 일을 전혀 지겹게 생각한 적이 없을뿐더러 자신의 예술활동을 뒤엎어버리는 과오도 범하지 않았다.


마네는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나는 마네가 살던 집에서 살고 있다. 마네와 베를렌느의 발자취를 따라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이곳에 정주하기로 작정했다. 마네와 말라르메는 이 지역 어느 곳에선가 어울려 지내곤 했다. 나는 지금 바티뇰 구역에 위치한 집에 살면서 마네에 관한 글을 쓴다. 바티뇰은 인상파 화가들이 우글거리던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훗날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문제작들을 준비하면서 엄청나고도 맹렬한 기세로 몰아닥칠 폭풍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내기 위해 혹시나 그들이 남긴 흔적이 있을까 이리저리 살핀다. 사진이 한 장 남아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가게를 정리하기 전에 사진을 찍은 물감 팔던 염료상이 아닐까 싶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가게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안료와 유화제를 비롯하여 붓이나 솔, 캔버스 등 화구들을 공급한 산실이었으리라.


가게에는 큼지막한 팔레트 형상의 조형물 아래 에느깽 화구점(MARCHAND DE COULEUS HENNEQUIN)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건물 정면은 1, 2층 할 것 없이 건물 전체에 빨갛고 푸른 장식 타일들이 붙어있다. 화구점과 인접하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스포츠 용품 옷 가게가 바로 붙어있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화려하게 꾸민 정면 건물 1층이 아주 근사하다(나는 이 가게가 자리한 건물이 헐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건물은 1830년대에 지어졌다. 아직도 건물 벽면에 새겨진 아르데코 풍의 철자들이 눈에 띈다. 클리쉬 대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곳과는 무관한 곳이다. 클리쉬 대로변은 그처럼 “1860년부터 188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마네와 그의 동료들 덕분에 유명해진” 곳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스만이 파리를 마구잡이 식 개발을 해나가던 그 시기에 화가들은 이곳 클리쉬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은 파리 서쪽방향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한창 공사 중인 생라자르 역과 이어져있었다. 하층민들 또한 이곳 공사장터에 몰려와서는 허름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판자촌에 살던 그 가난하고 뿌리 뽑힌 이들이 바로 마네가 작품에 즐겨 모델로 삼던 이들이다.


마네 자신은 엄청난 부르주아에 속한 중산층이었지만, 마네는 세느 강 좌안 중산층 동네를 벗어난 것에 대해 몹시 기뻐했다. 돈 푼깨나 있다고 거들먹거리면서 으스대는 인간 군상들의 꼬락서니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라 싶었던 것이다.


세느 강 우안의 동네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상황에 처한 뿌리 뽑힌 인간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에다가 예술가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동네였을 뿐만 아니라 강도에 도둑은 물론 불한당이나 불량배들까지 득실거리는 지역이었다.


바티뇰 지역은 오늘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한 집 아이들이 활보하고 있으며, 빈민층을 비롯하여 온갖 수공업 장인들에다 글깨나 쓴다는 이들까지 몰려와서 땅 한 평이라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마네와 일군의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그처럼 이곳이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 소피 소보(Sophie Chauveau)







[1] 이 대형 작품이 이처럼 보기 흉하게 잘린 것은 마네의 부인 수잔과 아들 레옹이 그림을 좀 더 많이 팔기 위해 갈갈히 찢은 탓이다. 마네 사후에 엄청난 가격에 마네의 그림들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네가 실제 그린 적이 없는 작품에다가 버젓이 마네의 서명을 그려 넣어 팔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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