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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루오

프랑스 문학의 오늘 70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장 루오(Jean Rouaud)



그가 뿌린 씨를 너는 거둬들이리라.



1996년 미뉘 출판사에서 간행된 장 루오(Jean Rouaud)의 세 번째 소설 『가상 세계(Le Monde à peu près)』는 프랑스 저 서쪽 대서양가에 위치한 브르타뉴 지방에서 벌어지는 조수간만의 차이에 대한 사유의 긴 행적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장 루오의 『가상 세계』


이 책이 대중으로부터 환영을 받기까지에는 확실히 1990년 이 무명의 소설가에게 공쿠르 상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던 『전쟁터(Les Chaps d’honneur)』의 명성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의 소설은 그때까지 그처럼 단지 신문 잡지 가판대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1990년 무명의 소설가였던 장 루오(Jean Rouaud)에게 공쿠르 상을 안겨준 『전쟁터(Les Chaps d’honneur)』.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루오(Rouaud)라는 이 엄청난 파도를 이해하는 데는 그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는 정반대로 의도적인 평범한 문체를 탈피하여 문장의 풍부함과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고 보인다.


“낮과 밤의 길이가 일치할 때, 조수간만의 차는 가장 큰 법인데, 둑으로 기어오르던 세찬 파도는 희디흰 포말로 부서져 낮은 돌담을 하얗게 표백시키거나 순식간에 보도에까지 흘러넘치곤 했다. 집채만한 파도는 뒤이어 간격을 두고 또 다시 밀려드는 다른 한 떼의 물보라와 함께 마치 바닷물의 흩뿌림처럼 그 허연 파도의 두꺼운 지방질을 포말로 흩뿌리면서 연속적인 흐름을 차단하듯 아주 희미한 귀머거림으로 멀어지다가 갑자기 다시 밀어닥치곤 했다.”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은유 표현의 새롭게 하기, 다시 말해 문장 구성의 점진적인 진보와도 같은 시도만을 놓고 볼 때, 루오의 이러한 표현은 에슈노가 간결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 보여준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만큼이나 독특하고도 유연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가는 주제 면에서 작가의 실제 삶에 바탕을 둔 서술에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아예 자서전으로 회귀해 간 다른 많은 실천적 작가들에 비하면 글쓰기에 더욱 의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애초 자서전적 기술체가 지닌 허구의 공백을 서술의 능란한 구성 유희에의 요소들로 채운, 하나의 집합체로 묶인 서로 다른 조각조각의 결합체들보다도 더욱 집요한 결집력을 지닌 것이었다.


“장 루오의 소설들에는 무수히 많은 비가 내린다”라고 장-피에르 리샤르(Jean-Pierre Richard)는 탁월한 저서 『독서의 토양(Terrains de lecture)』(1996)에서 이미 고찰한 바 있거니와 리샤르는 이 저술을 통하여 20세기 말에 주목할 만한 다른 6명의 작가들과 함께 루오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장-피에르 리샤르, 『독서의 토양』


“세부 묘사의 기교, 바람의 살랑거림, 톡톡 튀기듯 떨어지는 빗낱,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상업적 토대”라고 『가상 세계(Le Monde à peu près)』에서 이야기하는 작가 자신에게 루오는 또한 말하게 하지 않는가. 이 비는 그의 가냘픔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허용하게 하며, 그의 기다란 문장들이 기름칠을 한 듯 번지르한 문체로 바뀌게 만드는 어떤 연결 고리, 다시 말해 어떤 탄력성이라 해야 할 그 무엇을 확신케 해 주기에 충분하다.


장 루오(Jean Rouaud)의 『가상 세계(Le Monde à peu près)』


이 탄력성은 특히 3권의 자서전적 소설에서 읽혀지듯, 독특한 연속적 흐름을 확신케 하는 기억의 그 무엇이다. 이처럼 루오의 작품들은 모두가 다 폭이 좁혀 들어가는 전망의 차원에서 개인의 단독적인 문제를 조명하기 위해 가족사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했다. 그렇듯 전쟁터는 바로 작가 자신의 조부모가 관통해온 1914년의 전쟁을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소설 속에 밀어닥치는 세찬 물결은 공포 자체일 수 있으며, 또한 이프르 마을 부근의 독가스실마저 연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루오가 두 번째로 발표한 소설 『저명인사들(Des hommes illustres)』에서는 장-피에르 리샤르가 올곧게 표명한 것처럼 부친의 형상 주위로는 “돌맹이와 바위로 연상되는 브르타뉴 풍경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 결부된” 형체가 부여되기에 이른다.


장 루오의 『저명인사들』


논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상 세계』에 ‘실수를 연발하는 어수룩한 사람’(파트리크 그랭빌이 일간지 <휘가로(Le Figaro)> 신문에 쓴 루오의 작품에 대한 서평 기사 가운데 작중인물을 언급한 것을 그대로 옮겨본다)으로 등장하는 작중인물은 작가와 계보를 같이하는 윗대의 조부모 손자이거나 아들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앞에 언급한 루오의 두 작품들이 재치 면에서 활달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작중인물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에 쉽게 수긍이 간다. 『가상 세계』에 등장하는 실수를 연발하는 어수룩한 사람은 오로지 가상의 세계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인물이며, 또한 “흔들리는 시선으로 […]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쫓는” 자이고, 공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 때에조차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 허둥대면서도 공을 쫓아 죽으라고 뛰어다니는 로그렌느 친목회 팀 2진 멤버이기도 하다.


그의 동료 기프(Gyf : 조르주-이브 프랑수아(Georges-Yves François)의 약자) 또한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죽으라고 공을 쫓아다닌다. 이 자칭 스포츠맨들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반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Portrait de l’artiste en jeune homme)』(1916)에서 무서운 모습을 한 아르날 신부와 푸에타르 신부 앞에 유리알이 깨진 안경을 쓰고 벌벌 있는 스테판 드달러스만큼이나 연약하기 짝이 없다.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16.


화자는 체호프와 같이 혹은 트로츠키와도 같이 안경을 쓴 인물이어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이 스테판의 비약을 떠올릴 필요는 없으며, 또한 그와 같이 루오의 작중인물을 작가 자신과 연계시킬 이유조차 없다. 다만, 주인공은 사랑을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테오, 자신의 동료의 누이와의 사랑) 그는 “수평선을 재발견”하고자 나아갈 뿐이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트로츠키(왼쪽)과 안톤 체호프(오른쪽).


이 수평선은 그가 “혼수상태의 뒤엉킴” 속에서 상실해 버린 저쪽, 다시 말해 분명한 하나의 선을 긋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또 다른 문학을 창조했다는 말인가? 작가의 초상이 사막에서의 랭보의 모습과 흡사하다면, 혹은 우리가 단지 베를렌의 묘비명을 통해 짐작하듯이 작가가 고립된 시(詩)에로 함몰해 간다고 할 때, 그는 문학을 재발명한 것이 되는가? “도시 위로 부드럽게 비가 내린다”는 베를렌의 묘비명을 통해 이상야릇한 다음과 같은 소네트의 첫 구절을 가정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비는 동반자”라고.


비, 루오의 소설에는 항상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는 랭보의 ‘헹굼물’을 씻어내리는 비이며(랭보가 시집을 발표하기 이전에 창작한 「에덴」과 「하라」에서 이야기했던 바가 그렇다), 문학적 공간과 형식을 탐구하고자 했던 새로운 인간 장-아르튀르의 문학적 열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것도 비다.


그래서 루이는 장 에슈노가 『금발의 키 큰 여자들』에서 어떤 특별한 방법을 추구했듯이, 마치 시네마와 경쟁이라도 하듯 영화 시나리오의 글쓰기로 나아가고자 했던가? 그럼으로써 그는 파인더에 인칭대명사들을 맞추기 위한 방법을 비교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영화작가들 사이에 위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추락, 결국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갇히고 만 꼴이 되어버린 비참한 실패는 잘못된 판단에 따른 언어유희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베뜨(Yvette) 대 기프(Gyf) – 이 또한 그의 문학적 자부심에 금이 간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장-아르튀르의 역할 역시 그가 ‘누이 외논느’(『페드라(Phèdre)』에 ‘푸른 수염’이야기와 누이 안느의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뒤섞어가는)의 역할이나 ‘형제 레옹’(폴 클로델의 『새틴 구두(Le Soulier de Satin)』에서 마침내 “사로잡힌 영혼들에게 해방”을 하고 외치는)의 역할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장-아르튀르, 선천적으로 타고난 어수룩함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벅찬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그는 단지 절름발이에 불과할 따름이다.



테오여!
그대는 왜 날 버렸는가?



장 에슈노의 소설과 장 루오의 세 번째 소설집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은 이 두 소설들이 같은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점 말고도 서로 엇비슷한 평가 속에 똑같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른바 두 소설집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그 무엇을 다루고 있다는 평가가 그것이었는데, 이를 달리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티라 할 만한 무엇이 작품 속에 구현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티라 이야기되는 그 무엇은 실상 모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모방에의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자체적으로 심각성을 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패러디는 낡아빠진 것이 되고 말았으며, 상보적 텍스트에 의한 언어유희마저도 자체가 지닌 함정에 빠지고 말았고, 주제 면에서조차 이미 여러 차례 실험되어 온 미메시스에의 되풀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기술체는 근시안적 주제에 머무르고 말았다.


“언어로서의 완벽한 구현을 위한 기술체의 겹치기를 생각해 낸 것은 어렸을 적의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장 에슈노는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장 루오의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는 화자만을 놓고 봐도 이 어린 시절은 미련하고도 우둔한 되풀이를 넘어서지 못하는 주절거림을 단지 화자의 입술에 담아낼 뿐이다. “쏘시송, 딸기향을 가미한 멜바, 아니 치즈는 왜 안 된다는 거야, 난 먹을 수 있어.” 이야말로 장-아르튀르라는 아이에게 이어지는 문제의 심각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재등장을 놓고 봐도 장 루오의 소설은 바다라는 이미지를 단지 자잘한 사물들이 나열되어 있는 메뉴판이라 할 수 있는 모래 위에 넘실거리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모래 위에는 먹다버린 음식 찌꺼기하며, 온갖 파편 조각들이 난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은 해파리의 잔해들과 함께 파도가 밀어 올린 해초 나부랭이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다의 심상은 문학의 퇴조라는 차원에서 그 심각성이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큰 파도를 위한 썰물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작가의 고상한 배려에 따르자면, 이러한 계기 또한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그러한 역설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왜냐면 더 이상의 퇴조는 문학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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