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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희 May 10. 2023

대만판 광주사태, '228 사건'을 아십니까?

열여섯 살 딸과의 다시 대만 여행

'228 기념일'을 앞두고 대만 곳곳에서 여러 행사를 준비하는 듯했다. '화산 1914 문창원구'를 방문했더니 '대만인이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라며 '비정성시'를 상영하고 있었다. 이에 '228 사건'을 좀 더 이해해 보고자 2023년 2월 24일 '228 국가 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이나 박물관이라면 질색하는 딸아이를 억지로 끌고서... 


<화산 1914 문창원구에서 228 기념일을 맞이하여 재 상영하는 영화 '비정성시'>


'비정성시(悲情城市, 슬픔의 도시, 1990년 개봉)'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7년 228 사건까지의 격변하는 대만 사회를 한 가족의 몰락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일본군이 항복한다는 뉴스, 출산하는 여인의 신음소리, 여인을 격려하는 산파의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한 남자가 조상에게 순산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애를 태우며 기도를 하는 이는 북부 항구마을 지롱(基隆)에 사는 '임아록'이다. 막 탄생한 손주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끊겼던 전기가 들어와 집안에 불이 밝혀진다. 앞으로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을 보여주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임아록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장남인 문웅, 일본군에 끌려가 소식이 없는 차남 문상, 일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미친 상태로 돌아온 문량, 사진관을 운영하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막내 문청(양조위)이 그것이다. 



문청과 친구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저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에 화답하듯 창문을 열고 목청 높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 당시 대만사회에 가득했던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본군 퇴각 이후 그들의 바람대로 대만에 봄이 찾아왔을까? 한반도에 미국과 소련이 들어온 것처럼 대만에는 국민당 혁명군이 들어왔다. 그리고 일본 식민 시절보다 더 큰 고통이 덮쳐왔다. 


일본군 항복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국민당은 대만에서 전쟁물자를 공수해 갔고 이로 인해 민생은 더욱 피폐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해방 이후 대만에 들어온 국민당 군인들은 대만인들이 일본에 순응했다며 그들을 멸시하였다. 중국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들과 차별하여 표준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대만인(내성인, 內省人)은 지식인일지라도 정부에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정부와 관련된 사업은 외성인이 독점했다. 외성인이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식인, 상인, 노동자 할 것 없이 불만이 날로 높아졌다. 곳곳에서 군경과 충돌하는 등 사회 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1947년 2월 27일 저녁, 한 담배 노점 단속반원이  밀수 담배를 판매하는 임강만(林江邁)을 단속하는 과정에서(당시에 담배는 전매국이 독점하였다.) 권총으로 머리를 가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과잉 단속에 주변의 시민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당황한 단속반원이 권총 발사하였고 1명이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2월 28일, 분노한 민중이 행정장관 관공서 앞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하자 군인이 시민을 향해 기관총을 발포였고 수십 명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대만방송국을 점거하고 전국에 사건의 발생과 경과를 방송하였다. 대만 각지에서 청년, 민중, 퇴역 군인들이 호응하여 대만 전역으로 시위가 확대되었다. 이 방송국이 우리 모녀가 방문한 '228 국가 기념관'이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항의 시위를 진압했다. 이에 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만의 지식인들은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조직하고 행정장관 천이(陳儀)와 사건의 처리에 관해 교섭하려 했다. 영화 '비정성시'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문청'의 친구인 '관영'도 처리 위원회의 일원이 된다.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행정장관 '천이'도 동의하여 전국의 시위는 진정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천이는 협상에 응하면서 몰래 난징(南京 남경)의 국민당 정부 장개석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3월 8일, 장개석이 파견한 국민당 군대가 지롱항(임아록 가족이 사는 도시)으로 진입하였고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위 관련자와 지도자들을 진압, 학살, 체포하는 이른바 청향(淸鄕) 작업을 시행하였으니 이 기간 동안 약 3만 명(추정) 사망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문청'과 '관영'도 반정부 활동을 하였으나 결국 관영은 총살당한다. 비극적 결말을 예감한 문청은 가족사진(관영 여동생과 결혼하였다)을 찍고, 며칠 후 어디론가 끌려가게 된다.


좌: 228 기념관 내 '수난자의 벽' / 우: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내 '수형 기록 카드'


228 기념관 내 '수난자의 벽'에 전시되어 있는 국민당 진압군에 의해 살해당한 수난자의 사진을 보면서 저들이 영화 속 '관영'과 '문청'이겠구나 싶었다. 광주사태와 서대문 형무소의 수형 기록 카드로 가득찬 전시관이 오버랩 되었다. 대만과 한국 공통의 역사인 일본 침략-해방-외세에 의한 수난-군부독재-시민운동-무력 진압의 현장을 보고 있자니 뭔가 저릿해졌다.


228 사건 진압 이후에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내리고 228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였다. 1949년 5월 20일에 발표한 계엄령은 무려 38년간 이어졌으니 이 기나긴 계엄 기건 동안 228 사건은 점차 기억에서 사라졌다. 계엄령은 1987년 7월 15일이 되어서야 해제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표준어가 아닌 말을 하면 벌 받았었어."


대만 친구 '쯔치'가 학교, 관공서, 공공장소에서 표준어만 사용해야 했다고 말했을 땐 그런 강압정인 정책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했었다. 하지만 쯔치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1980년대가 계엄 정국이었음을 알게 되니 이해가 간다.


1988년 대만 출신의 이등휘 총통이 당선되고 나서야 시민 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228 사건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228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기념공원을 건립하였다. 


228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중정기념당'을 방문하였다. 중정기념당은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당이다. 대만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2000년에는 대만 국제공항의 이름이 '장개석 국제공항'이었다. 지금은 '타오위엔 국제공항'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중정기념당 홈페이지에 설 전날과 설날 당일, 그리고 228 기념일에는 휴관한다고 안내되어 있는 것을 보니 228 사건과 장개석에 대한 현재 대만 사람들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영화 비정성시 임아록 가문의 네 아들 중 장남은 상하이파 조직의 보스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일본군에 끌려가 소식조차 없던 둘째 문상은 어디에서 사망했는지 유품만 집으로 돌아온다. 친일파로 몰려 고문을 당한 문량은 완전히 미친 상태가 되었고, 막내인 문청도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어딘가로 끌려간다. 늙은 임아록과 문량, 그리고 일본이 항복하던 날 태어난 손자가 둘러앉자 밥을 먹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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