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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희 Jan 04. 2024

고려인 중학생 올렉의 '햄버거'란? 그리고 엄마...

중학교 한국어 교실 이야기

"주말에 뭐 했어요?"


중학교 한국어 교실, 월요일이면 반드시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은 세 가지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게임만 했어요."
"계속 잤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러나 올렉은 늘 "시장에 갔어요." "청소했어요."라고 대답한다. 몇 주 동안은 서울에 있는 치과에 다녀왔다고도 했다. 치과에서 1+1 행사를 해서 엄마와 아빠가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것이다. 분명 한국어가 서툰 부모님을 돕기 위해 동행했을 것이다.


"왜 올렉이 주말마다 시장에 가?"
"엄마가 바빠요. 그래서 엄마를 도와줘요."
"아, 엄마 대신 시장에 장 보러 가는 거구나."


차분하고, 리더십 있고, 책임감 있고, 예의 바른 데다가 스위트하기까지! 주책스럽지만 딸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성품이 참으로 맘에 들어 나 혼자 몰래 마음속의 '사윗감'으로 낙점한 녀석이 한 명 있었는데, 올렉은 두 번째 '사윗감 후보'(주책스런 아줌마의 혼자만의 생각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로 생각했을 정도로 참한 아이다. 그런 올렉이 글짓기를 위한 인터뷰에서 '추억이 떠오르는 음식'으로 '햄버거'를 꼽았다.




< 햄버거 >

이름: 올렉(중학교 2학년, 15세)  

              

카자흐스탄에 살 때 엄마는 시장에서 일하셨어요. 나는 늘 엄마 일을 도와줬어요. 2016년 어느 날 엄마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녁으로 가족들이 먹을 햄버거를 샀어요.     


아빠, 큰형, 작은형은 햄버거를 먼저 먹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청소, 설거지, 요리를 먼저 했어요. 저는 햄버거를 먹지 않고 엄마를 도와줬어요. 엄마 일이 끝난 후 엄마랑 같이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었어요. 햄버거는 너무 맛있었어요. 너무 빨리 먹어서 금방 없어졌어요.

 

다음 날 아침에 엄마는 점심 도시락으로 햄버거를 또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일하러 갔어요. 저는 그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가서 먹었어요. 학교에서 점심시간만 기다렸어요. 친구들이 “조금만 줘, 조금만 줘” 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엄마가 고마웠어요.




2016년이라고 했으니 여덟 살 정도였을 것이다. '아들 삼 형제 가운데 막내인 올렉은 어릴 때부터 엄마를 도와줬구나.' 생각했다.


데니스와의 '김치찌개' 인터뷰(앞선 글 '고려인 중학생 데니스에게 김치찌개란?' 참고) 후에 한국에 막 와서 밥을 잘 못 먹는 데니스를 바라보는 데니스 엄마의 안타까움에 더 공감한 나는 이번에도 올렉이 너무나도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올렉 엄마에 더 주목했다. 올렉 엄마의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집안에는 해야 할 일이 또 산더미이다. 일단 남편과 아이들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하고 집안일을 시작한다. 바지런히 이것저것 하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묵묵히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자그마한 올렉이 보인다. 집안일을 마치고 마침내 올렉과 마주 앉아 햄버거를 먹는다. 배가 고파서인지 맛있게 먹는 올렉을 보고 다음날 아침에 부랴부랴 햄버거를 만든다. 그리고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인 이른 아침에 다시 일터로 나간다.


주말반인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의 고려인 성인 학습자들이 말한 적 있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사람들로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자가 권위적이라고(물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빨래해요. 청소해요. 요리해요. 공장에서 일해요. 남편 집에서 일 안 해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출신의 방송인 일리야도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라는 책에서 "러시아는 가부장적인 전통이 아주 강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는 나라 걱정, 여자는 가족 걱정을 해야 한다."는 러시아 우스갯소리가 있다고도 했다.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집안일 먼저 할 수밖에 없었던 올렉의 엄마!




예전 우리 엄마도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은 제과점을 하셨었다. 가게가 2호선 신대방 역 앞에 있었기 때문에 지하철 운행을 마치는 밤 12시 무렵까지 장사를 하셨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누였다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시작했다. 새벽에 제빵사 아저씨를 도우러 나갔던 아빠와 교대로 일을 하셨으나 가족을 위한 아침밥과 나의 도시락 두 개, 동생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은 엄마 몫이었다.


영교시와 야간 자율학습까지 한다고 나만 힘든 줄 알았던 나는 엄마의 고단함을 전혀 돌아보지 못했다. 부모님들은 피곤할 리, 지칠 리, 힘들 리 없다고 여겼던 것일까? 사춘기랍시고, 공부한답시고 까칠하고 틱틱거리는 딸아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한숨과 인내가 있었을까... 간혹 하셨던 "너 같은 딸 한 번 키워봐."라는 말씀이 진심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나이 들어 가끔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날이면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멍청했음에 대한 후회로 창 밖이 훤해지도록 뒤척인다.


엄마의 고단함을 이른 나이에 알게 된 올렉이, 주말마다 장을 보는 올렉이 참으로 기특하고 또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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