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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Nov 27. 2020

일곱 살짜리의 명문

어느 순간부터 대형 마트를 잘 가지 않는다. 한 때는 아들들을 카트에 태워 습관처럼 마트를 돌다가 충동구매도 하고 문화센터도 가곤 했는데 이제는 몇 달에 한번 갈까 말까다. 온라인 구매를 훨씬 많이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형 마트에 한 번씩 들어갔다 나오는 절차가 너무 피곤하다.

주차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힘들다. 주차장은 넓고 주차할 자리는 없고 마트는 복잡하고 진열 상품은 많고 카트는 크고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는 만원이고 시끄러운 할인 및 광고 방송은 끊이질 않고 여기저기서 시식을 권유하고 계산하는 줄은 긴데 심지어는 딱히 저렴한 가격에 샀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치 않았던 물건들을 생각 없이 사게 되어 지출이 늘어났다는 찜찜한 느낌으로 집에 돌아온다.

얼마 전 동네에서 우연히 중소형 슈퍼마켓을 발견했는데 가격도 좋았고 간편하게 장을 보니 시간도 단축되어 그 뒤로도 몇 번 갔다.


문제는 내가 심각한 길치이자 방향치라는 것이다. 우리 동네이긴 하지만 거의 가는 일이 없는 지역이고 삐뚤빼뚤 골목이 많은 곳이다. 나는 바둑판 배열이 아닌 길에 들어가는 순간 광활한 암흑의 우주에 혼자 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멍해진다. 이번이 네 번째 가는 길인데도 그랬다.

둘째를 뒷좌석에 태우고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 사이를 왔다 갔다 골목골목 누비며 헤맸다. 우여곡절 끝에 슈퍼마켓을 찾아 장을 보고 나오는데 둘째가 다짐을 받는다. 엄마, 다음번에는 잘 찾을 수 있지요? 나도 기억할 거예요.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커피를 뽑아 식탁에 앉았더니 식탁 모서리에 하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둘째가 써서 붙여놓은 것이다. 엄마가 까먹지 말라고 슈퍼마켓 이름을 외워두었다며 다음번에도 생각이 안 나면 이걸 꼭 보란다. 상호명 옆에 가게 모양도 그려 넣었다.


길치에 방향치, 건망증까지 심해 잊지 않으려고 열심히 메모를 해두어도 메모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나지만 사랑스러운 둘째의 이 메모만큼은 마음에 꼭 새겨 둬야겠다. 그 어떤 명문장가의 글도 일곱 살짜리의 이 짧은 한 줄 메모만큼 따뜻한 사랑을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물론 슈퍼마켓 이름을 기억한다고 해서 다음번에 길을 잘 찾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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