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로하스 Polohath Dec 12. 2020

휴일이면 하루 종일 아이에게 뭘 먹일까만 생각한다.

밥도 먹이고 간식도 먹이고 과일도 먹이고 비타민도 먹이고 그러고도 수시로 배고파? 뭐 줄까? 하는 게 입에 붙어버렸다.

엄마랑 살 때 틈만 나면 먹이려고 하셔서 스트레스도 받고 짜증도 났었는데 내가 엄마가 되니 똑같이 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우리 엄마보다는 낫다고 자위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우리 엄마처럼 먹으라는 잔소리 위에 몸매 관리하라는 잔소리까지 추가하는 이율배반을 저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긴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에게 몸매 관리 운운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하루 종일 아들에게 뭐 먹을래 하다가 갑자기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나서 찾아보았다.  

회사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직장 동료나 파트너 회사 직원들의 안내는 자연스럽게 내가 맡아야 했는데 식사 때마다 그들이 깜짝 놀라던 상황들이 재미있어서 썼던 글이었다.

                                                                                        

그 당시 나의 상사인 부사장님은 영국인이었다. 영국인이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아시아에서 보냈고 경력도 아시아에서 쌓은 분이라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건강 관리에 철저한 분이라 출장을 가더라도 아침마다 꼬박꼬박 조깅을 했으며 식사와 음주도 엄격히 조절하여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흡연도 해본 적이 없다.


식사와 운동에 철저한 사람들에게 잦은 출장은 고역이다. 시차가 바뀌면서 일정도 흔들리고 현지 파트너들이 최고급 식당에서 극진히 대접하고자 하니 식욕을 절제하기 어렵다.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음식 문화를 접한 부사장님이지만 한국인들과의 식사만큼은 쉽지 않았나 보다. 본인이 경험한 어떤 나라보다도 많이 먹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라며 늘 놀라곤 했다.                                              

                                           

한정식 집에서 줄줄이 코스가 나오고 2/3 쯤 순서가 지나 더 이상 먹기 힘들어질 때가 되어도 한국인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코스는 여기까지 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이제 살았다~ 안도할 무렵 어김없이 나오는 멘트.

"식사는 어떻게 하실까요?"


여태까지 내가 먹은 건 식사가 아니고 대체 뭐였던 말인가.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하지만 나도 뭐라 설명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한국에서 식사란 곧 밥이요, 조금 양보하면 면이다. 밥이나 면으로 마무리 짓지 않고는 아무리 진수성찬을 먹어도 식사라고 할 수가 없다. 한국어에서 끼니, 식사 (Meal)를 뜻하는 말과 쌀밥 (Rice) 등의 음식 종류를 나타내는 단어가 모두 "밥"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깃집에 가면 서양식 스테이크의 족히 두배 정도 되는 분량의 갈비를 여자들도 부담 없이 먹어치운다.  단언컨대, 나는 아직도 고깃집에서 1인분만 먹는 한국인을 본 적이 없다. 아예 고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나나 우리 집안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우리 집안사람들 같은 경우는 그냥 고깃집에 안 가고 말지 애써 피운 숯불이 아깝게 1인당 1인분만 먹으려고 고깃집을 찾지는 않는다.


외국인 접대 음식 인기 1순위는 예나 지금이나 갈비인지라 한국에 출장 오면 고깃집은 꼭 한번 가게 되는데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을 만큼 고기를 잔뜩 먹은 뒤에도 역시나 충격적인 질문을 받는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까요?"

그리고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냉면 그릇들.


기름진 중식을 코스로 먹어치운 뒤에도 마지막은 언제나 "식사는 어떻게 하실까요?"


언제 어디서나 메뉴 상관없이 울려 퍼지는 이놈의 "식사는 어떻게" 드립에 가엾은 부사장님은 한국 출장 때마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반찬은 왜 계속 리필되는 거냐. 접대받는 건지 고문받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내게 귓속말로 "이거 식사야 아니야?" "음식 앞으로 몇 개 남았어?" 물어보며 양을 조절하던 부사장님의 모습은 상대방의 문화를 배려하고 혹시라도 식사 자리에서 실례를 범할까 조심하고 노력했던 프로의 자세로 내게 남아있다.                                              


우리 조상님들의 먹방에 대한 기록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공감하는 이유도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식사량을 보고 놀라던 경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입이 짧다는 말을 더 많이 듣는 나도 외국 직원들로부터는 종종 대식가라는 말을 듣곤 한다. 한국인 맞나 보다.


"조선인들이 대식가라는 점에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

- 독일인 여행가 바르텍


"보통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2배를 먹는다"

- 영국인 선교사 그리피스 존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먹는 것은 천하제일인데 이는 오키나와에까지 소문났으며 부귀한 집은 하루에 일곱 번도 먹는다"

- 이익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이 얼마나 있는지 첩자가 알아내 왔다.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 그래서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하고 성 앞에 진을 치고 1달간 기다렸는데 1달이 지나도 왜군이 후퇴하지 않자 결국 공격해서 쫓아냈다. 왜군 진영에서 나온 밥그릇이 조선군 밥그릇의 1/3 정도임을 보고 이놈들이 오래 버티려고 김치 종지에 밥을 먹었구나!라고 생각했다."

- 오희문의 쇄미록 중에서

                                          

한국인들은 많이 먹는다와 꼭 함께 듣는 말은 근데 왜 다 날씬해요?라는 질문이다. 한국인의 비만율 계속 높아지는 추세고 특히 소아비만의 급증이 크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한국인들이 서양인들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 동양인들과 비교해도 비교적 날씬하고 키가 큰 편이다. 그래서 그 질문 속에는 궁금함과 부러움이 반반씩 섞여 있다.


그 의문은 모든 반찬을 한상에 차려 내는 쌀밥집에 외국인 파트너들을 데려갔을 때 풀렸다. 이 많은 음식 중에 튀긴 음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서양에서는 건강식으로 알려진 일식도 고로케나 돈가스, 덴푸라 등의 튀긴 음식이 종종 식탁에 올라오는데 한식에는 정말이지 수십 가지 반찬 중  튀긴 음식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식사 전에 음료를 시키는 것이 서양에서는 당연한 절차이고 습관이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직원이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음료 주문이다. 술이 주가 되는 식당이나 양식이 아닌 이상 한국의 식당에는 따로 음료 메뉴가 없다. 음료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없다. 주스나 탄산음료를 한식에 곁들인다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일일 테니까. 이 또한 살이 찌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 듯싶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메뉴를 찾는다. 그런 거 없다. 쌀밥집에서 디저트 메뉴라니 주방 이모님이 놀라 경기하실 일이다.  칼로리 높은 튀김, 음료, 디저트, 다 빼고 건강한 채소 위주로 엄청 많이 먹는 밥상이 한국식 밥상인 것이다. 이래서 한국인은 많이 먹어도 날씬한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식후의 달달함 없이 끝내기는 아쉬워 식당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었다. 마셔보더니 또 좋단다. 음식과 음료의 마리아주는 와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맵고 자극적인 한식을 먹은 뒤 마시는 다방 커피의 달콤 쌉싸름한 맛처럼 완벽한 마리아주가 또 있을까.






학창 시절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엥겔지수라는 것이 있다. 독일의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이 처음 논한 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총소득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그리고 이 비율은 소득이 낮을수록 높고 소득이 높은 상위층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돈을 벌면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 식비부터 지출한다. 그러고 나서 남은 돈으로 옷을 사고 문화생활을 하고 기타 필요한 것들에 쓰게 된다. 백만 원 버는 사람이 한 달에 50만 원을 식비에 쓴다면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50%나 되지만 천만 원 버는 사람은 무려 네 배인 200만 원어치를 먹어도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엥겔지수가 낮을수록 상위층이고 소득이 높으며 엥겔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부자 나라이고 선진국이라고 배워왔는데 요즘 이 엥겔지수가 점점 무색해지고 있다. 먹는다는 것이 단순한 생존의 의미를 넘어서 그 자체가 가지는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있고 재미와 취미가 있으며 식사를 통한 사회생활과 인간 사이 교류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식비 만으로 계층을 구분할 수는 있는 시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요즘 유튜브와 티브이를 점령한 먹방만 봐도 그렇다. 한국인이 먹는 이유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그것이 문화생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밥이 어떤 의미인지를 한 마디로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 식구.


가족을 식구, 즉 "먹는 입"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을 보며 행복한 것처럼 식구끼리 자식끼리 소중한 음식, 내 생명 연장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 밥을 나누고 양보하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다.


그 옛날부터 외국인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든 먹방의 원조가 바로 우리의 조상님들이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식구를 위해서라면 입맛 없다, 배부르다, 싫어한다며 그릇을 밀어내는 것 또한 우리의 부모님이고 조상님이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음식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먹는 음식은 더욱 사랑한다. 엄청난 식욕이든, 절제하는 식욕이든, 건강한 식욕이든, 불량한 식욕이든, 내 입에 들어가는 밥도,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도, 세계 어느 나라 요리보다 건강한 한국인의 밥도, 모든 밥은 눈물겹고 아름답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우리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에게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형아랑 동생이 사이좋게 나눠먹으라는 잔소리도 계속된다.

그래서 오늘도 내 핸드폰 배경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깔려 있다.



작가의 이전글 라퐁텐 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