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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Nov 22. 2020

내 심장이 쫄깃했던 순간

마스크 판매 일지

봄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꽃샘추위 때문인지 날은 점점 더 추워져만 가고. 설 명절이 지나서 그리 바쁘지 않았던 2월의 어느 날. 창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무심코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오늘은 조금 한가하네요?" 말하기만 하면 반대로 된다는 그 마법의 한 마디. 마법이 통한 걸까. 잠시 뒤 도착한 메일 한통으로 나는 잊지 못할 매일을 경험하게 된다. 


'[긴급][전달] 공적 마스크 판매 안내' 


2월 25일, 우체국은 보건용 마스크 공적 판매처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우체국쇼핑 등 온라인으로만 판매가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이 몰리면서 사이트는 마비가 되어 버렸고, 온라인에 익숙지 않은 고령층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왔다. 결국 28일 오후 2시부터 대구, 청도 지역과 공급여건이 취약한 전국 읍 면 소재 우체국에서 오프라인으로 마스크 판매가 시작되었다. 우리 우체국도 그중 하나였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판매 첫날.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오던 날이었다. 오전에 조금씩 내리던 비는 점심이 지나면서 점점 거세졌고,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좁은 우체국은 발 디딜 틈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마을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마스크 언제 팔아요? 지금 사람이 많은데 무작정 세워두시면 안 되죠! 빨리 뭐라도 조치를 좀 하세요!" 항의들은 계속 쏟아지고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리고. 


그 날 배부된 100개 남짓한 마스크는 몇 분만에 동이 났고, 마스크를 사지 못하신 분들은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분노를 쏟아내셨다. "사람들이 지금 몇 백 명이 왔는데 고작 그거만 파는 게 말이 되느냐! 물량을 더 확보하고 팔아야 하지 않느냐! 더 있는데 너희들이 숨겨놓고 안 파는 거 아니냐!" 


그 이후 몇 개월 동안 아침에 출근하는 게 많이 부담스러웠다. 차를 타고 우체국으로 올라가는 길.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우체국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얘기하던 사람들 중 한 분이 나를 보고 큰 소리로 외친다. "어! 저기 온다!"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수백 개의 눈들. 예전에 봤던 그리스 로마 신화. 100개의 눈을 가졌다는 아르고스를 만난 헤르메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아르고스의 눈들이 몇 개는 감겨있고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을 쳐다보고 있다면, 여기는 모든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 매일 아침을 심장 쫄깃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적당한 자극은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매일마다 국별로 배부되는 마스크 수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끽해야 200개. 1인당 5매만 구매 가능. 이후 수량과 구매 기준이 달라지긴 했지만 거의 비슷했다. 우리 우체국에서 하루에 살 수 있는 사람은 겨우 40명. 판매 자체는 빛의 속도로 끝나지만 그 전후의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드리고, 

번호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이야기하고, 

손바닥에 번호를 쓰시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마스크 5부 제라 해당되는 날짜에 오셔야만 살 수 있다고 알려드리고, 

오늘 배부된 마스크는 이미 매진이 되어서 남은 게 없다고 사과드리고,

전국적으로 판매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로 판매는 어렵다 설명드리고,  

미리 돈을 받고 내일 마스크를 따로 빼놓을 수는 없다고 양해를 부탁드리고, 

적다 보니 계속 푸념만 늘어놓는 것 같아 너무 창피하고. 


과거의 기억은 미화된다고들 한다. 머릿속 상자에 담긴 수많은 기억들. 힘들고 지쳤던 기억들은 빠르게 흩어져버리고, 좋았던 기억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시간이 더 지나 어떤 일이었는지 정확히 생각나진 않아도 좋았었던 그 감정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감정을 떠올리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겠지. 아. 그래도 마스크를 판매하면서 겪었던 일들은 그리 미화될 것 같진 않다. 뭐.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물론 공적 마스크 판매는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일이었고, 그 일을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 맡았을 뿐이다. 소소한 보람도 있긴 했지만 원래 해야 하는 본연의 업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려운 시간들을 함께 겪었던 동료들에게 잠시 이 지면을 빌려 감사했다고, 참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요새는 마스크를 안 쓰는 분들이 더러 보인다. 내가 일하는 곳이 쭉 확진자가 없는 지역이라 그런지, 조금 긴장을 늦추신 듯하다. 그래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다들 잘 써주시는 편이다. 물론 엇나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꼭 얘기를 하실 때 마스크를 내리고 하는 사람. 전화할 때 마스크를 내리고 크게 말하는 사람. 지폐를 셀 때 꼭 하나하나 침을 묻혀가며 세는 사람. 


9월쯤이었나. 들어오실 때는 마스크를 쓰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니 대뜸 물건을 집어던지며 화를 내시던 고객님. "그놈의 마스크 마스크! 여기는 공기가 깨끗한 청정지역이라 괜찮아! 괜히 너희들이 걸리기 싫어서 마스크를 쓰라고 호들갑을 떨며 강요하는 거 아냐!" 인근 파출소에서 경찰분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시기 전까지, 내 말 하나라도 틀린 게 있냐며 큰 소리를 치시던 고객님의 표정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마스크 착용은 다른 누군가를 위하는 동시에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코로나로 인해 다들 날카로워진 요즘. 날 선 말로 서로를 해하는 것보다 힘들고 지친 마음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준다면 좋을 텐데. 


"매일마다 마스크 쓰고 일하시면 힘드시겠어요." 가끔 듣는 그 말 한마디가 정말 고맙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더니 옛말 하나 틀린 게 없다. 힘들었던 하루로 잃었던 웃음들을 다시 돌려받는 느낌. 두꺼운 마스크를 바이러스는 통과하지 못하지만, 사랑을 담은 따뜻한 말들은 마스크를 넘어 서로에게 잘 전달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아. 그런데. 나쁜 말들은 통과가 안 되는 마스크는 없을까. 개발되기만 하면 잔뜩 사서 무료 나눔을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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