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미 Apr 27. 2017

눈의 횡단

서른 다섯에 이별하다

 

  홋카이도에 간 것은 1월. 애인과 이별했고, 나는 어디든 가야했다. 침대에 누우면 나를 향해 쏟아지던 폭언이 가위처럼 몸을 짓눌렀다. 그렇게 회색 캐리어에 읽다만 책과 일기장, 티셔츠, 칫솔과 치약을 구겨 넣었다. 묵직한 캐리어와 나는 국경을 넘어 날아갔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하코다테까지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달렸다. 우치우라만을 끼고 둥글게 달리는 기차의 근육이 나를 좌우로 흔들었다. 몸에 힘을 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회색 캐리어와 나는 도시에서 도시로 넘어갔다. 세 시간이 넘도록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간간히 들리는 안내방송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어서 좋았다. 폭설. 눈은 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저를 두껍게 덧칠했다. 창밖으로 놀이터 하나를 집어삼킨 눈 무덤과 커다란 나무 하나를 쓰러뜨린 눈의 무리가 보였다. 먼 숲으로 이어진 어떤 짐승의 발자국도 눈이 지우고 있었다.   




  일주일동안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삿포로에서 비에이로 그리고 다시 아바시리로, 서에서 동으로, 섬을 관통해 갔다. 내가 섬 하나를 횡단하는 동안 애인도 내 속을 횡단했다. 핏줄이고, 뼈고, 장기고 할 것 없이 다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끝까지 이기적이다. 제 상처에만 비명 지르는 칼날 같은 사람.  


  오래 달리는 동안 창밖의 기후는 몇 번이나 바뀌었고, 앞자리,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언어도 일본어에서 중국어로 한국어에서 다시 일본어로 국적을 바뀌었다. 이국의 언어가 패딩에 머리카락에, 와 닿아 깨졌다. 



함께 미지로 떠나는 시집



  홋카이도의 눈은 질겼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생각처럼 눈은 모자에, 신발에, 옷을 꽉 물고 잘 털어지지 않았다. 하코다테의 외국인 묘지에서 이국의 귀신을 대면할 때도, 뚱뚱한 고양이가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을 때도, 지도를 잘못 읽어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도 흰자만 뜬 채 눈은 나를 봤다. 유령같이 창백하게 붙어 나를 봤다.  


  역에서 헤어지는 연인 사이에도 폭설은 쏟아졌다. 날카로운 눈발이 꼭 붙었다 떨어진 연인의 가슴 사이를 파고들었다. 연인이 껴안고 있던 자리에, 눈의 손톱이 할퀴고 간 그 자리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회색 캐리어를 끌고 지나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는 기차가 천천히 출발할 때 기차를 따라 달려오던 애인의 얼굴이 저쪽으로 길어졌던 것처럼 역들은 멀어졌다. 온기 하나 없는 플랫폼에서 플랫폼으로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는 기차를 타고 계속 달려갔다. 



아바시리 역과 가까운 기타하마 역



  최종 목적지는 아바시리 역. 유빙이 있다는 그곳에 가서 너를 버리리라. 그렇게 잊으리라. 근사하지? 오호츠크해에 너를 쑤셔 박고 다신 찾으러 오지 않을 거다. 춥고 외로운 곳에서 그렇게 사라져라. 그게 내가 주는 벌이다.


  쇄빙선 갑판에서, 아무도 없는 기타하마 역에서 넘실거리는 오호츠크해를 봤다. 어디든 가야한다고 생각했을 때 왜 그토록 이 섬이 나를 불러댔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는 섬의 끝, 오호츠크해. 회색 캐리어와 눈을 횡단하며 계속 어딘가로 걸어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