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차를 마셨다. 얼마 전에 선물받은, 돌의 속을 파서 만든 주전자에 차를 끓이면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깊은 맛이 온다. 한 번도 인간을 본 적 없는 바위의 속살을 핥는 느낌,
가본 적 없는 곳에서 왔다는 이 돌 주전자는 거기서만 산다고 했다. 우리나라엔 없다고,
세상엔 내가 모르는 모양이 얼마나 많을까. 모르는 맛이 얼마나 많을까. 모르는 침묵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어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짧은 강의를 헀다.
선생님은 내 산문집을 밤새워 읽었다고 하셨다. 어떤 분은 처음부터 끌까지 문장을 꾸미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다. 나머지 분들은 책을 읽지 않아 송구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전화를 준 선배님은 이번에 발표하는 너의 시는 첫 시집보다 쉬워서 좋다고 하셨다. 나는 쉬워지고 있나. 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양파 공동체>시집에 다 담았었는데, 그걸 읽어준 사람이 몇명 없었겠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산문집을 내길 잘했다. 희애언니는 산문집을 읽고 시집을 다시 읽어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뭔가 알 것 같다고도 했다. 나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애정을 주는 사람들은 언제나 고맙고 신기하고, 또 나를 부끄럽게 한다.
강의하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10만원을 주셨다. 사양하다가 가방에 찔러넣는 선생님의 손과 엘리베이터 문이 동시에 열려 떠밀리듯 받아왔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하다가. 잡지를 구독하기로 했다. 어제 도서관에서 열어본 사진예술이라는 잡지. 잡지 한 권안에 묵직하게 예술가들의 영혼이 담겨 있는 그 잡지 거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지금 광주와 대구에서는 국제사진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 사울 리히터라는 이름. 그는 유명해지려 애쓰지 않았다. 색의 선구자라 불리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다보면 선구자가 된다고.
백남준 선생은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잡지를 구독했다고 한다. 그는 부자여서 그 비싼 피아노를 부수고
다락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을 해체했다고 한다. 그런 파괴와 집요함이 하나의 색깔이 되었다고. 시대를 앞서갔다고. 백남준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걸 들춰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과 스티븐잡스가 개발한 세상이 이미 백남준의 아이디어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미술강의는 흥미롭다.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 대학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데 그걸 빌리기 위해서는 안암동에 가서 대출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그 책 한 권을 위해서 나는, 이 가을 언제쯤 안암동에 가겠지. 그리고 세종에 있는 캠퍼스에 소장하고 있는 책을 빌리겠지. 책 한 권을 빌리기 위해. 그렇게 보고 싶은 책이 있다
내년엔 북유럽에 가서 몇 달 머물다 오려 한다. 시와표현에서 진행하는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나의 스케줄을 객관적으로 적고 보니 매일 매일 뭔가 있다. 그림도 그리고 수영도 배우고 강의도 하고 일도 하고, 그러고보니 진득하게 어딘가 틀어박혀 있질 못했다. 늘 그랬지만 분주했다.
채록 푸는 일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듣는 것 그리고 거기에 끼어드는 나의 늘어진 목소리를 듣는 것, 고스란히 녹음된 불협화음과 반복되는 말들, 망설임들, 흥분과 환희, 그리고 붙잡힌 순간들, 그 시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에너지. 그건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한 분야에 오래 머물면서 켜켜이 쌓인 에너지다. 그건 누구도 흉내 못낸다. 자신을 설명할 때의 자신감은 누구도 흉내 못 낸다. 선생님은 그랬다. 일흔이 되어서야 무용을 알겠다고.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고. 쉰이 되면 조금 알 것 같고, 예순이 되면 조금 더 분명해지고 일흔이 되면, 확실해진다고. 그제야 아는 거라고. 그렇다면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나는 뭘 안단 말인가.
어제는 수영장 위 도서관에 앉아 시를 썼다. 내 앞 사람은 공업용 계산기를 두드리며 문제를 풀다가 샤프를 눌러대다가 잠을 자다가 자리를 비웠고 또 한 사람은 요지부동의 자세로 독서대에 올려 놓은 책을 봤다. 공무원 문제집 같은 거였는데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면 주로 그렇다. 영어를 공부하거나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아이와 함께 나와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고 있거나,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나는 시를 쓴다. 그들 역시 호기심에 내가 가진 책을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제 할 일에 빠져든다.
그들을 앞에 두고 나는 시를 쓴다. 물론 완성하지 못했다. 종말과 꿀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은데 아직 두 번 밖에 쓰지 못했다. 시를 쓸 떄 스케치북 같은 거에 연필로 쓴다. 이쪽에 썼다가 저쪽으로 옮겨적으면서 뺄 건 빼고 보탤 건 보탠다. 오른쪽에 쓰면 다음 페이지에 쓰기 어려우니까 이면지에 옮겼다가 다시 다음장 왼쪽 페이지로 옮긴다. 페이지가 쭉쭉 넘어가기도 전에, 수영 시간이 되어 수영에 갔다. 아직 몸에 힘이 다 안 풀려서, 경직되고 느리다. 그래도 물 속에 있는 시간은 자유롭다. 물 밖과 물 속과 색연필로 색칠하는 곳과 사람들 앞에 서서 내 시를 이야기 하는 장소와 그리고 내 침대 속과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 섞여 도서관과 분식집에 요즘 나는 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