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미 Oct 18. 2018

산책 그리고 케이티

점심 약속에 가서 돌솥 비빔밥을 먹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세종으로 넘어오는데 날씨가 너무 아까웠다. 이 좋은 날, 어디라도 가자. 엄마와 이모에게 전화했다. 모두 없었다. 수영장이 있는 보람동에 차를 세우고 시청을 지나 천변을 걸어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시청을 지나는데, 유리벽 안으로 빼곡하게 쌓인 책이 보여서 처음으로 세종시청에 갔다. 


체지방 측정도 해보고 (체지방 과다였다) 1층 도서관도 구경했는데, 거기서 내셔널지오그래픽스를 봤다. 3개월치를 한꺼번에 읽어봐야지 하고 자리에 앉았다. 거기서 나는 케이티를 봤다. 케이티의 이야기를 읽었다. 케이티는 애인이 다른 여자에게 보낸 문자를 보고, 따져 물었다. 애인은 이별을 통보했다. 케이티는 엽총으로 자신의 턱을 쐈다. 총알이 아래에서 위로 관통해갔다. 얼굴이 사라졌다. 케이티의 얼굴 중 입꼬리 부분은 훼손되지 않아서 케이티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미소만이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케이티는 오랜 기다림 끝에 안면인식 수술을 받았다.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여성의 얼굴이었다. 얼굴을 통째로 이식받았다. 의사들은 되도록 케이티 본래의 얼굴을 많이 남겨두고 싶어 했다. 


그리고 또 이런 글이 있었다.


"인간 외에 자신을 알아보는 것으로 알려진 동물로는 유인원, 아시안 코끼리, 까치, 큰 돌고래가 있다. 그러나 인간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드러낸다고 알려졌다" - <내셔널지오그래픽스>, 2018. 9. 


인간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주름과 점 등 결점을 찾아내기 바쁘다고. 거기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케이티는 거리에서 평범하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얼굴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평범한 얼굴로 사람들 틈을 스쳐 다시 거리로 나왔다. 나는 나를 알아보고 있나. 심란한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나는 나를 알아보고 있나.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해를 등지고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노을을 보며 걷기 위해서. 걸으면서 붉게 물든 아직 어린 나무들과 원반을 물어오는 사냥개와 최신 댄스곡을 들으며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봤다. 모두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그러는 중에 틈틈, 해야 할 일들과 써야 할 원고들이 생각났다. 원고료는 줄 수 없지만 한 달에 한 번 기고를 할 수 있냐는 신문사의 연락에 조금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글은 써야 하므로, 나는 계속 써야 하므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시 2편은 곧 마감인데 나는 한 편도 완성을 못했다.  허수경 시인의 추모식을 한국에서 한다고 했었는데 그날이 언제였더라. 시집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언제 보낸담. 월요일에 선배를 만나니까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이 나오면 반응이 어떨까. 그런 생각들이 주루룩! 


그러고 돌아오는 길에 해가 지는 하늘을 보는데, 알록달록한 구름을 보는데,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얼굴이 있어서  나를 알아보는 얼굴이 있어서 문득, 다행인 거다. 오늘 밤엔 수영을 할 두 발이 있고 두 팔이 있어서 또 다행인 거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이 어느 나라 수영을 하는 거냐. 고 물었지만, 뭐 어쨌든 물속에서 휘적거릴 수 있어서 또 좋은 거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마치 나를 위해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도 없고 나만 있는데, 낙엽이 별사탕처럼 떨어졌다. 나는 또 얼굴이 있어서 그걸 볼 수 있어서 뚜벅뚜벅 걸어가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서, 오늘도 괜찮은 거다. 



케이티가 행복해지길. 

작가의 이전글 어떤 가을 오전에 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