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밀리 Mar 02. 2023

나를 타인으로 밀쳐놓고 싶은 순간

아고타 크리스토프『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986, 1988, 1991

나를 타인으로 밀쳐놓고 싶은 순간


대혼란의 이야기


이언 매큐언의『속죄』를 읽을 때도 그랬다.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야 드러난 진실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며 어느 부분이 상상 속 이야기인가? 소설 자체가 허구인데 허구 속 허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속죄를 위한 이야기인지, 자기변호를 위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소설의 ‘형식’ 그 자체에 관해 고민하는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반전의 결말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보다 더한 소설을 만났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쭉 이어서 한 번에 쓴 것이 아니다. 제1부 「비밀 노트」는 1986년에, 제2부 「타인의 증거」는 1988년에, 제3부 「50년간의 고독」은 1991년에 발표되었다. 따로 떼어 놓아도 훌륭한 세 편의 소설이 상호연관성을 가진 한 편의 장편 소설로 탄생한 셈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읽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의 처절한 생존 노력이 우리를 쉼 없는 긴장으로 내몰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3부의 시작과 함께 대혼란이 시작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 어느 부분이 몽상이고 허구였는지 의심이 시작되면서 첫 장부터 책을 다시 넘겨보게 된다. 심지어 주인공이 한 명이었는지, 두 명이었는지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모든 이야기를 리셋시키는 3부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짧게 요약해 보겠다.


1부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 국경 근처 소도시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쌍둥이의 이야기이다. 손자들보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먼저인 할머니와 함께 사는 쌍둥이 형제는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의 생존법을 먼저 익힌다. 잔꾀, 거짓말, 사기와 기만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갈취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일상이 되어가는 폭력에 내성을 키우기 위해 서로의 몸에 채찍을 내리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취학 연령이 되었지만, 학교에 가는 대신 외국어를 배워 통역하고, 시내에서 하모니카 공연을 하며 용돈벌이하던 쌍둥이 형제에게 느닷없이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빠’가 찾아온다.


국경을 넘도록 도와달라는 아빠의 요청에 따라 일직선으로 걸어가면 한 개의 지뢰를 밟을 확률을 가진 국경지대를 통과하던 쌍둥이는 앞서 걸어가던 아빠의 폭사를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기이한 것은 아빠를 잃은 형제의 충격과 슬픔에 관한 묘사가 단 한 줄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신 소설은 그들의 영악한 깨달음만 기술한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p. 192) 형제에게는 ‘누군가’에 불과한 아빠의 시체를 밟고 한 명은 국경을 넘어가고, 한 명은 다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1부는 끝난다.


2부에는 드디어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등장한다. 1부에서 그저 ‘우리’라는 한 묶음 대명사로만 존재했던 형제의 이름은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였다. 같은 철자를 다르게 배열하여 탄생한 이름들이다. 전쟁이 끝난 1956년 헝가리 반체제 혁명의 시기,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었던 클라우스의 소식은 없고, 2부의 내용은 여전히 국경 소도시에 사는 루카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낫과 망치’로 상징되는 나치즘과 공산주의 체제를 거치며 마을 사람들이 감당하게 된 개인적 비극의 이야기들도 곁들여진다.


할머니의 죽음 후에도 계속 할머니의 집에 머물던 루카스는 이제 시내에 있는 서점을 인수해서 살아간다. 잠시 함께 산 야스민이 그의 곁을 떠나고 그녀가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이 마티아스에게 친자식 이상의 애정을 쏟으며 살지만, 엄마에게 버림받고 장애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던 아이는 루카스와 7년 4개월을 함께 한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예전 살던 할머니의 집 근처에서 야스민으로 추정되는 시체 한 구가 발견된 뒤 용의선상에 오른 루카스는 잠적하고, 2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소식이 끊어졌던 클라우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가 국경을 넘어간 지 30년 만이다. 그렇게 2부는 마무리된다.


이제 혼란의 3부 이야기다. 1, 2부와는 달리 일인칭 단수 ‘나’가 화자가 되어 기술하고 있다. 예전 살던 곳으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마을에서 20년 전 자취를 감춘 그의 형제 루카스를 찾아다니지만, 취학 기록이 없는 그의 존재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클라우스는 여권상 체류 기간이 지나 세 번을 연장했으나 네 번째는 거부당했고, 경찰서 청사 보호실에 감금된다. 대사관 직원과 함께 예전 부모와 함께 살던 집을 방문한 클라우스는 봉인되어 있지만 절대로 잊지는 않았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린다.


독자가 혼란스러워지는 이유가 바로 이 기억 때문이다. 1부와 2부에서 언급한 부모에 대한 기억과 완전히 다르다. 쌍둥이가 정말 있었겠느냐는 의문과 함께, 루카스가 진짜 존재했던 인물인지, 아니면 클라우스만 존재했던 것인지, 루카스의 망상의 인물이 클라우스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혼돈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지금까지 읽은 내용은 그럼 뭐지? 누구의 이야기지?’라는 의문과 함께 탐정의 눈길로 1부와 2부의 내용을 다시 넘겨보게 된다. 드러낼 듯 감출 듯 독자와의 유희를 즐기는 소설의 안개를 이제 걷어 보겠다.


종이와 연필


루카스와 클라우스, 혹은 루카스이자 클라우스가 곧 굶어 죽어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글쓰기였다. 소설의 시작 부분, 살 곳을 잃고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어린 쌍둥이 형제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는데 그들이 가져온 물품 중에 무거운 ‘사전’이 있었다. 전쟁상황에서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을 담았을 가방과 함께 형제가 갖고 온 것이 아버지가 쓰던 대사전이라니. 사전이 상징하는 어휘력은 글쓰기의 기본 도구다.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와도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라는, 아니 글쓰기 자체가 생존의 흔적이 될 것이라는 강한 암시가 들어 있는 첫 장면이다.


사전과 함께 글쓰기를 상징하는 또 다른 물건은 ‘종이와 연필’이다. 자신들을 ‘개자식’이라 부르며 굶기기를 다반사로 하는 할머니 밑에서 자라지만, 형제는 서점 주인에게 달걀을 주고 ‘종이와 연필’을 수시로 얻어 온다. 그리고는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담는 그들만의 ‘비밀 노트’(1부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만든다. 본격적인 글쓰기의 시작이다. 적군의 폭격이 끝난 후 약탈 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날 때 형제도 서점을 약탈했고, 그들이 가지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백과사전, 노트와 연필이었다. 


글쓰기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가졌던 이 조숙한 형제들은 작가의 분신이다. 조국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해서 시계 공장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머리로는 시를 짓곤 했다’라고 작가는 자신의 망명 시절을 회고한다. 글쓰기가 숙명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존재했던 모든 물건이 다 사라지고 비단 한 필과 펜 한 자루씩만 주어지는 세상이 와도 이들은 비단 위에 시를 쓰고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을 때에도 이들은 입고 있던 마지막 옷을 벗어 그 위에 글을 쓸 사람들이다. 글쓰기가 생존과 동의어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2부에 등장하는 빅토르라는 인물이 아마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힐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303)


루카스와 클라우스도 그랬다.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며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확인했다. 2부에서 루카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연필로 백지를 메우는 게 취미예요.”(212)


망상, 거짓, 그리고 치유 


그런데 이들의 글쓰기, 뭔가 이상하다. 경험한 것을 쓰겠다는 존재의 기록인데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3부를 근거로 1부와 2부의 내용을 반추해 보면 망상과 거짓에 가까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유는 하나다. 솔직하게 쓰지 않은 것이다. 글을 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왜 그랬을까? 


글을 쓴 사람은 지금은 시인 클라우스 T로 사는 루카스다. 클라우스라는 인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루카스만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며 그는 국경을 넘어가며 조서에 나이와 이름을 다르게 기재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두 가지다. 거짓말을 통해 15세의 루카스는 18세의 클라우스가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가지 거짓말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아버지에 관한 조서 기록이었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3부에서 밝혀지는 루카스의 가족사는 전쟁 통이지만 전쟁과는 동떨어진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종군 기자로 전쟁터로 떠나겠다는 아버지가 사실은 내연녀와 함께 살기 위해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총으로 아버지를 쏘아 죽인 후 아들인 루카스에게까지 총상을 입히게 된다. 엄마는 정신 병동에 감금되고, 겨우 목숨을 건진 루카스는 재활병원에서 힘들게 지내다가 병원이 폭격으로 무너지자 수녀의 손에 이끌려 간 노파의 집에서 살게 된다. 1부에서 손자들을 ‘개자식’이라 부르며 정신적, 물리적 학대를 가한 바로 그 할머니다. 그러므로 1부의 내용은 온통 거짓이다. 쌍둥이의 손을 이끌고 할머니의 집에 데려다주며 곧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는 사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루카스를 할머니에게로 데려다준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수녀였으며 할머니도 진짜 할머니가 아니다. 그저 전쟁통에 돈을 받고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사람 중 하나로 추정할 뿐이다.  


게다가 형제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찾아온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엄마의 총에 맞아 죽었으므로 형제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망명을 도와달라고 찾아온 낯선 남자에 불과하다.


가장 큰 거짓은 애초에 쌍둥이 형제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1부를 읽을 때 생겼던 의문 하나가 해소된다. 1부의 화자는 ‘우리’다. 샴쌍둥이도 아니고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한 두 명의 쌍둥이 형제는 항상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한 번도 다른 행동반경에 있었던 적이 없다.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3부에서 클라우스이자 루카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두 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 도시에서 열다섯 살 때까지 함께 살았던 내 형제를 찾는 중이라는 것을. 이 모든 것이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는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 왔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452)     


그러므로 2부의 내용은 전부 거짓이다. 루카스이자 클라우스는 계속 그 도시에 살았을 때의 모습을 가정하며 루카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갑자기 사라지게 되는 30세까지의 생활을 꾸며 낸 것이다. 형제가 함께 써 내려갔다는 비밀 노트의 원고도 몇십 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클라우스 T가 돌아와서 체류한 6개월간 써 내려간 흔적이 있을 뿐이라는 경찰서장의 추측도 더해진다. 클라우스 자신도 ‘노트’에 대해 결국 이렇게 쓰고 있다.


순 거짓말이죠…. 네, 꾸며낸 이야기예요. 진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얘기지요. (469)    

 

만약 1, 2부의 내용이 클라우스가 된 루카스가 지어낸 이야기라면 왜 이런 기록이 필요했을까. 기록의 기능에는 기억도 있지만, 치유도 있다. 루카스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네댓 살 무렵 총상을 입었고 그에게 총을 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엄마였다. 물론 엄마의 조준은 아버지를 향해 있었고 아들을 향한 고의성은 없었다 하더라도 엄마에게 총을 맞아 척추 근처에 총상의 흔적을 가진 채 50년을 살아온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기자였던 아버지는 전시에 종군 기자로 활동하다가, 혹은 망명의 길을 가다가 지뢰를 밟아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연녀와 함께 살겠다는 선언을 엄마 앞에서 하다가 엄마가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정신 병원에 감금된 엄마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였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고아 아닌 고아였다. 재활원에서 지냈지만, 그마저도 폭격당하고 수녀의 손에 이끌려 어느 고약한 노파와 함께 살게 된 어느 외로운 아이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냉혹하고 폭력적인 현실에 함께 맞서줄 쌍둥이 형제를 가공해 낼 수밖에 없었다.


형제뿐만 아니라 어린 루카스에게는 상상 속에서라도 다른 부모가 필요했다. 자신에게 총을 쏜 엄마가 아니라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엄마가 있어야 했다. 바람이 나서 가정을 버리려 했던 아빠가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자신을 보러 오는 아빠도 필요했다. 한 마디로 그에게는 ‘다른 자아(alter ego)’가 필요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는 트라우마의 그늘이 너무 짙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실 속 자아가 멍들고 상처 입었기 때문에, 클라우스가 된 루카스에게 과거의 루카스는 ‘타인’으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자아의 분리를 위해 ‘타인’이라는 증거도 필요했다. 2부의 제목이 ‘타인의 증거’가 된 이유다. 빅토르의 말처럼 기록만이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므로 트라우마투성이의 루카스를 타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클라우스(결국 루카스)는 루카스의 과거(자신의 과거)를 다시 쓴다. 망상과 거짓으로 써 내려가는 글 속에서는 자신을 보러 오는 부모도 있고, 폭력의 시대를 함께 헤쳐 나가는 쌍둥이 형제도 있다.


하지만 3부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인간의 상처 입은 영혼이 망상을 글로 옮긴다고 온전히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스는 루카스를 찾아 살던 곳으로 다시 왔다고 했지만, 막상 그를 만나게 되자 그의 존재를 부정한다. 루카스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은 결국 삶이 아니라 죽음을 택한다.

 

혼란의 3부를 읽은 뒤 다시 넘겨 본 1부와 2부의 기록은 눈물겹다. 상처투성이 영혼이 망상으로 지은 집 속에서 위로를 찾고 있었다니. 그 안에는 부모도 있고, 욕쟁이지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할머니도 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형제도 있다. 비록 자기 아들은 아니지만, 애정을 쏟아 키운 아들도 있고 사랑하는 여자도 있다. 대담한 성적 묘사도 척추 손상으로 성 기능을 상실했을 수도 있을 인간의 상상 속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나’를 ‘나’로부터 분리하는 이중 정체성 창조 작업을 글쓰기를 통해 할 수밖에 없었던 루카스. 자존감이 툭 떨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고 싶은 순간, 또는 나를 타인으로 밀쳐놓고 싶은 순간에 ‘50년간의 고독(3부의 제목)’을 망상적 글쓰기를 통해 치유해 나가던 루카스의 이야기를 손에 들고 읽어 보기를 권한다. 때론 망상도 힘이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986, 1988, 1991), (용경식 옮김, 까치글방, 2015)             

작가의 이전글 우주 시대의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