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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Feb 26. 2023

우주 시대의 사랑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김보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우주시대의 사랑


인내하는 사랑


‘식사 시간을 피해서 읽을 것’이라는 주의사항이 적혀 있는 소설이 있다. 배명훈의 단편「예술과 중력가속도」다. 식사 시간을 피하라니. 밥맛 떨어지는 뭔가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지는 법. 마침 밥때가 되었지만 소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대 무용을 하는 여자와 그 예술세계를 이해해 보려는 남자가 막 시작한 연애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이해의 정도가 지구 수준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행성마다 달라지는 중력가속도의 세계를 이해해야 하는 그야말로 범우주적인 연애.


여자는 달에서 왔다. 문자 그대로 달에서 살다가 달기지가 폐쇄되면서 지구로 이민 온 여자는 지구의 1/6에 해당하는 중력을 가진 달에서 배운 무용 기술을 지구에서 하나도 쓸 수 없게 되어 좌절하고 있었다. 점프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에서 하던 것만큼 높이 뛸 수 없었다.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짜증이 안나는 자신의 상태를 사랑이라 진단을 내린 남자.


그러던 어느 날, ‘외계예술가협회’ 설립 축하 공연 무대에 여자가 초대받아 무대에 서게 되고 남자에게 초대장을 내민다. 모처럼 달에서의 기술을 구현할 수 있게 되어 신이 난 여자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공연장이 있는 미국 나사 우주센터까지 간 남자는 돌고래모양의 비행선을 타고 대기권 어딘가 무중력 공연장에 도착한다. 3부의 달 중력 공연 무대에 서는 여자를 보기 위해 1부의 화성중력, 2부의 무중력 공연을 견뎌 낸 남자. ‘견뎌 낸’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중력 적응과정에서 겪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멀미’때문이었다.     

  

멀미였다. 그것도 아주 생애 최대의 멀미였다. 객석 곳곳에서 고통스러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은경 씨가 나올 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했다. 은경 씨의 점프를 볼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 뒤에는 죽어도 별 수 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좌석마다 부착되어 있던 비밀 가방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것 같았다. (186)      


남자가 ‘그제야’ 비닐 가방의 용도를 깨달았다면,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왜 식사시간을 피해서 읽으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짧은 몇 페이지 안에 이렇게나 많은 ‘우웩’이 들어 있다니. 사랑하는 여자의 무대를 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속이 뒤집히는 고통을 참아내는 남자. 위를 토해내고 뇌까지 토해 내었다는 남자가 끝끝내 토해 내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은 여자를 사랑하는 ‘영혼’이었다.


지구 수준의 사랑도 적응할 일이 많고 힘에 부치는데, 우주 수준의 사랑은 중력차이까지 극복해야 하다니. 그런 시대가 오면 행성 간 연애는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사랑이 어디 이런저런 것들 재 가면서 하는 것이랴. 누군가는 화성 남자와 사랑에 빠져 비닐 가방을 옆구리에 차고 우웩 우웩하면서도 화성을 오갈 것이며, 또 누군가는 무중력 행성 여자와 사랑에 빠져 그야말로 영혼까지 토해내는 죽을 정도의 사랑을 할 것이다. 어쩌겠나. 사랑은 때론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서야 하는 일인 것을. 그리고 때론 죽을 정도로 뭔가 참아내어야 하는 일인 것을.     

      

기다리는 사랑


배명훈의 소설이 중력 차이로 인한 성간 연애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라면, 김보영의『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시차 속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혼을 앞둔 한 남자가 있다. 예식을 치를 교회도 정해 두었고 결혼반지도 맞췄다. 결혼식을 보러 오겠다는 친구들도 제법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남자는 지구에 있는데 여자는 지구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 각기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이다. 다른 별로 이주하는 가족 배웅을 위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또 다른 태양계, ‘알파 센터우리’를 다녀오는 길인 여자는 결혼을 위해 4.37광년의 속도로 지구로 날아오는 중이다.


지구에서의 몇 년은 우주에서는 고작 몇 달이다. 여자와의 시차를 줄이기 위해, 혼자만 나이 먹지 않기 위해, 남자는 우주를 떠다니는 ‘기다림의 배’에 오른다. 승선자중에는 성간 연애를 하는 다른 예비신랑들도 있지만 다른 시간대로 가서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곧 바뀔 연금제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시대를 잘못 만나 자신의 예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생각했다. 몇 년 전 말기암에 걸린 한 영국 소녀가 의료 기술이 진보해 있을 미래 세상에서 두 번째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죽음대신 냉동보존술 처치를 택했다는 뉴스보도를 본 적이 있다. 우주 공간의 두 달이 지구 4년 반에 해당한다면 ‘기다림의 배’를 타고 1~2년 정도만 버틴다면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도 획기적인 치료법이 나온 세상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치료법이 나올 때마다 아직은 희망적인 뉴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다른 환우들에게 환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하며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한 때 삶의 끝에서 절망했던 사람들이 새 희망을 갖고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기다림의 배’에 올라탄 남자도과연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까. 도시 크기의 큰 우주선에서 ’기다림‘을 시작했던 남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은 ‘돛단배’(42), ‘조각배’(67)라고 부르는 작은 우주선으로 옮겨 타게  된다. 그리고 두 달 예정이었던 여행은 남자, 여자 각 각의 사정에 의해 우주 공간에서만 10년 가까운 여행이 되어 버린다. 그동안 지구에서는 223년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남자 혼자 지구에 착륙하여 200여 년 전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던 교회를 찾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그가 우주 공간에 있던 시간 동안 지구는 얼마나 변했을까. 두 번째 삶을 꿈 꾸며 냉동보존술을 택한 사람들을 깨울 만큼 진일보한 세상이 되어 있을까.


불행히도 소설이 그리는 지구의 미래는 암울하다. 귀환한 남자가 마주한 지구는 원전 폭발, 전쟁, 운석과의 충돌로 인해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마음뿐. 세상이 잿빛으로 변해도, 결혼식에 참석하겠다던 가족도, 친구들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남자는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한 여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쓰는 마지막 독백의 편지를 쓴다.


남자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던 교회에는 수없이 많은 방문의 흔적을 담은 노란색 종이들이 붙어 있다. 작가는 다른 노래를 떠올리며 이 장면을 썼다고 하지만, ‘노란색’에서 바로 ‘토니 올란도 앤 던’(Tony Orlando & Dawn)의 ‘오래된 떡갈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묶어 주세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가 떠올랐다. 내가 기다리고 그리워한 만큼 상대도 나를 기다리고 보고 싶어 했을까라는 초조한 마음, 그리고 같은 마음이었음을 확인한 순간의 기쁨을 그리는 노래. 고작 두 달의 헤어짐일 뿐이라고, 지구 시간으로는 4년 반의 시간일 뿐이라고 했던 이별이 200년을 훌쩍 넘겼지만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기약으로, 나중에는 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 하나로 외로운 우주 공간에서 긴 세월을 버텨 온 남자의 이야기.


이 소설이 결혼을 앞둔 어느 예비 신랑이 작가에게 특별 부탁을 해서 탄생한 프러포즈 소설임을 알게 되면서 그 신선한 발상에 놀랐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그려내는 SF 청혼소설이라니. 마지막 장면이 드러내는 가녀린 가능성은 이들의 만남을 암시하는 것일까.         


사랑은 자전 중, 사랑법은 공전 중


성간 여행이 가능한 미래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배명훈과 김보영의 소설은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의 낭만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참음, 서로 다른 감정의 속도를 견뎌내는 기다림, 그리고 상대에게 가 닿고 싶은 그리움이라는 공통분모 말이다. 레트로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김보영의 소설 속 ‘손편지’가 바로 이것을 드러내는 장치다. 행성 여행을 마음대로 하는 시대에 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예쁜 편지지에 애틋한 손 편지를 쓰는 남자라니. 우주선 창 가에 기대어 쓴다는 사실 말고는, 휘영청 달 아래 정인을 보고 싶어 하며 그 마음을 한지에 붓으로 써 내려간 그 옛날 어느 선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인내와 기다림은 사랑의 본질이지만 사랑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한다. 집 전화기와 편지로만 연락이 가능했던 불과 몇 십 년 전의 연애법이 아득한 옛이야기로 느껴질 만큼 지금 이 시대의 연애는 24시간 소통 창구가 열려 있다. 존 그레이가 쓴『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녀의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은유적 제목을 택했지만, 미래에는 문자 그대로 화성 출신 남자와 금성 출신 여자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구토를 참아가며 중력의 차이를 견디고, 외로운 우주 고아로 떠돌면서 시차를 극복해야 하는 사랑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한들, 김보영의 소설 속 남자가 200여 년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결혼반지처럼, 사랑이라는 감정만은 고색창연하게 살아남아 그 시대에 맞는 사랑법을 우리들에게 처방할 것이다. 참고 기다리는 사랑의 본질은 그 모습 그대로 자전 중이며 사랑법만 시대를 달리하며 공전할 것이니.


당장은 위와 뇌를 다 토해낼 정도로 ‘우웩’ 거릴 사랑을 하지 않아도, 조각배 우주선을 타고 기계가 빚어내는 찌꺼기 먹거리를 먹어가며 외롭게 우주 공간에서 버티는 일 없이도 연애를 할 수 있는 지구 수준의 안전한 사랑법에 감사할 뿐이다.       



배명훈『예술과 중력가속도』(2010)  (북하우스, 2016)  

김보영『당신을 기다리고 있어』(2020) (파란 미디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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