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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Dec 17. 2022

노인이 지켜줄 수 없는 그녀, 칼라 진

코맥 매카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

노인이 지켜줄 수 없는 그녀, 칼라 진    


“내 남편이 나를 죽이려 했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칼라 진은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묻는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돈 가방을 들고 달아나던 남편의 말에 따라 할머니 집에 피신해 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남자가 나타나 총구를 겨눈다. 왜 죽이느냐는 질문에 ‘당신 잘못은 없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남자는 그녀를 쏘아버린다.      


그녀를 쏜 남자의 이름은 안톤 시거. 마약상들에게 고용된 청부업자다. 사실 그의 목표물은 칼라 진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 르웰린 모스였고, 더 정확하게는 모스가 들고 달아난 돈 가방이었다. 용접공 일을 하며 컨테이너에서 어린 아내와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던 모스는 영양을 사냥하다가 우연히 실패한 마약 밀거래 현장을 발견하고, 240만 불이라는 거액이 든 돈 가방을 손에 넣는다. 돈을 찾아오려는 시거와 수중에 들어온 일확천금을 지키려고 달아나는 모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한 남자가 더 끼어든다. 이 둘을 다 잡으려는 보안관 벨이다. 소설은 이 세 남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시작해서 최후의 승자를 남기며 끝난다.      


▫️제목의 의미   

   

소설의 제목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행, ‘저곳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왔다. 노인이라고 해 봤자 늙어가는 보안관 벨과 그의 꿈속에 한두 번 등장하는 아버지가 전부인 소설의 제목이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일까. 은유로 넘쳐나는 예이츠의 시처럼 소설에서의 ‘노인’은 단순히 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이상과 지혜, 전통적인 가치를 총칭하는 상징으로서의 추상명사다.     


시에서 노인이 비잔티움으로 항해를 떠나며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현재를 한탄하듯, 소설도 과거의 이상만으로는 대처가 안 되는 현재 미국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과거의 이상과 현재의 지혜를 모두 끌어모아도 해결이 안 되는 예측 불가능의 미래가 도래할 것임을 경고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미래 사회에 대한 섬뜩한 경고장으로도 볼 수 있다. 노인의 지혜, 즉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경험으로는 이해도 설명도 불가능할 미래의 시간을 위해 인류는 과연 어떤 대비를 하고 있을까.    

 

시의 마지막 행은 ‘비잔티움의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노래해주도록 (To lords and ladies of Byzantium / Of what is past, or passing, or to come)’이다. 소설의 세 축을 이루는 인물, 벨, 모스, 시거가 바로 ‘지나간 날(what is past)’ ‘지나가고 있는 현재(passing)’ ‘다가올 미래(to come)’를 나타내는 인물들이다. 카우보이 모자, 라이플총, 캐틀건으로 구분되는 세 사람의 상징성을 먼저 들여다보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벨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보안관으로 일하는 늙은 보안관 벨은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던 초기 미국의 이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베트남전에서 분대원 모두를 잃고 혼자 살아 돌아와 전쟁 훈장을 받은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그는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매일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멋있게 사건을 해결하던 화려했던 시대가 저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노인들에게 지급되는 사회보장 연금을 대신 타기 위해 노부부를 뜰에 파묻은 사람들, 아무나 죽일 생각으로 14세 소녀를 죽여놓고도, 감옥에서 나가면 또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소년. 잔혹한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새로운 종자’를 벨은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 보안관 벨은 현대의 범죄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벨이 시거를 번번이 놓치고 모스와 시거보다 늘 한 걸음 늦게 현장에 도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벨은 옛날 수사 방식으로 인과의 논리에 따라 예측하고 움직이지만 시거 같은 사이코패스는 예측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움직이는 카우보이 모자의 이상은 유효기간이 끝났다.      


라이플총을 든 모스, 그의 아내 칼라 진     


돈 가방을 들고 달아나는 자, 모스는 미국의 현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모스(Moss)라는 이름은 작가의 의도적인 ‘말장난(pun)’이다.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불나방(moth)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용접공이다. ‘붙일 수 있는 것들은 한꺼번에 다 녹여서 갖다 붙였다’라는 그의 말에서 수많은 이민자를 필요한 곳에 갖다 붙여 쓰면서 성장해온 나라, 미국을 떠올린다.      


벨의 카우보이 모자와 총이 자유와 정의를 수호한다고 표방하던 과거 미국의 가치를 나타낸다면, 모스가 들고 다니는 라이플총은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현재 미국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영양은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젊은이다운 동력을 상실해가는 청년들을 가리키는 동시에, 베트남을 영향력 아래 두려 했던 미국의 권력욕으로 인해 이국땅에서 숨을 거둬야 했던 수많은 참전 청년들을 나타낸다.  

    

베트남 전쟁은 이 소설이 자주 환기하는 과거의 사건이다. 노래를 통해 전쟁을 비판했던 밥 딜런의 ‘바람의 소리’에 담겨 있는 가사,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견딜 건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는 걸 알 때까지’처럼, 결국 패배한 명분 없는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꽃 같은 청년들이 그들의 죽음을 ‘견디는’ 조국에 의해 희생당했다. 


모스의 아내 칼라 진이 바로 이런 청년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서른여섯 살의 남편과 함께 희망도 문을 닫아버린 듯한 이름을 가진 마을, ‘데저트 에어(Desert Air)’의 컨테이너 집에서 살던 그녀는 돈 가방 때문에 남편과 헤어진다. 헤어진다는 말도 사실 적당한 말이 아니다. 기약 없이 도망가는 남편이 할머니 집에 가 있으라는 말만 남겼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신을 데리러 와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날을 견디던 그녀가 마침내 맞이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그녀를 죽이러 온 시거였다.      


칼라 진을 죽인 사람은 시거지만, 결국은 모스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거는 모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모스와 마주한 시거가 돈 가방을 고이 돌려주면 모스만 죽일 것이지만,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의 아내 칼라 진까지 찾아가서 죽일 것이라고 경고했고 모스는 아내의 죽음까지 담보로 잡히는 불운한 선택을 해 버렸다.      


‘내 남편이 나를 죽이려 했다고요?’라고 끝까지 남편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칼라 진의 모습은, 세계를 제패하려는 욕망의 제물로 희생되면서도 조국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못하고 전사했던 수많은 젊은이의 모습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작가의 의도적 장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칼라 진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청년들의 평균 나이와 같은 19세였다.      


캐틀건을 든 시거


이 소설에서 우리는 섬뜩한 인간 유형을 만나게 된다. 이해와 상식의 영역을 벗어난 사이코패스다. 소설을 코엔 형제가 영화화했을 때 시거 역을 맡은 배우는 하비에르 바르뎀이었다. 그의 무표정한 사이코패스 연기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영화를 본 후 며칠 동안 단발머리에 중저음 목소리를 가진 시거에게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시거가 저지르는 살인에는 동기가 없다.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인다. 심지어 그의 마음을 잠시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시거를 움직이는 동인은 우연과 충동이다. 그를 잡으려면 동선을 예측하고 미리 가 있어야 하는데, 규칙성과 인과율의 법칙을 따르는 보안관은 번번이 그를 놓칠 수밖에 없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없는 시거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을 게임처럼 즐긴다. 동전의 면을 알아맞히는 확률 게임에 이겨서 주유소 주인은 살고, 틀려서 칼라 진은 죽는다. 자신만의 단순하고 명료한 법칙을 따르는 시거에게 ‘나를 왜 죽이지요?’라고 원인을 따져 묻는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는 논리와 설명의 영역을 벗어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시거가 살인을 저지르며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캐틀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살인 도구로 소를 죽이듯이 미간을 정통으로 쏘아 사람을 죽이고도 오직 자기 손에 피가 묻었을까, 신발에 피가 튀었을까만 신경 쓴다. 욕조에 있는 사람을 쏠 때도 세라믹 조각이 행여 옷에라도 튈까 봐 몇 걸음 물러서서 쏜다.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나를 똑바로 봐’라고 말하는 시거. 그는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 잡혀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는, ‘우리가 자초한’ 신인류다.  


노인의 지혜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칼라 진은 남편이 고작 돈 가방 하나와 아내인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었겠느냐고 생각하며 죽어가지만, 그럴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뉴스로 접하게 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며, 가족보다 돈 가방을 우선순위에 두는 모스족, 사람의 목숨 정도는 하찮게 여기는 시거족이 점점 늘어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노인의 지혜와 경험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벨이 모스와 시거를 잡지 못하고 칼라 진의 목숨도 구하지 못한 채 무력감 속에서 은퇴해 버린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나를 해칠 까닭은 없어요’(p. 278)라며, 이유 없음 속에서 이유를 찾고 싶었던 칼라 진은 이유도 모른 채 죽을 수밖에 없다. 가족애가 발을 붙이고 인과성의 논리가 살아 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영광의 도시 비잔티움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로 갈 건지 아나’라고 시거는 여러 차례 묻는다. 어디로 가는지 가늠이 안 되는 시거의 행보 속에 노인이 더 이상 지켜 줄 수 없는 그녀, 칼라 진이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다.           


코맥 매카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 임재서 옮김, (주)사피엔스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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