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감성을 끼얹은 AAA급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손님의 빨래물에 가짜 눈알을 붙여놓는 철없는 남편을 둔 부인.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에블린은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느끼는 중국 이민 여성이다. 대책 없이 밝기만 한 남편과 레즈비언인 사춘기 딸과 보수적이고 꽉 막힌 아버지를 둔 채 세무조사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짜증과 잔소리만 가득하다. 소통이 되지 않는 벽 같던 에블린은 갑자기 멀티버스에서 온 남편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과 힘을 자각한다.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왜 도입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영화에서 멀티버스는 선택의 기로에서 한 선택을 할 때마다 또다른 평행우주가 하나씩 생긴다는 설정이다. 즉, 이 우주의 에블린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서 실패감을 느낄 때마다, 반대로 성공적인 선택을 한 에블린이 다른 우주에서 하나씩 늘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다른 길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곤 한다. 에블린은 다른 길로 갔던 자신의 삶을 멀티버스 속에서 경험해본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모든 에블린의 자아가 한 곳으로 합쳐져서 한 번에 힘을 발휘할 때, 에블린은 우주의 섭리를 깨닫고 자신이 지금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불교의 만다라처럼 나타낸 포스터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만다라는 부처가 이미 경험한 것들을 나타낸 그림으로,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모든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통합된 것은 부처가 모든 것들을 경험한 뒤, 덕을 갖추고 진리를 깨우치게 되는 것처럼, 에블린이 득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에블린이 구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실패했다고 느끼는 현재 자신의 삶이었다. 절대악으로 표현된 존재는 다름 아닌 자신의 딸.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숨기려는 엄마에게 상처를 받고, 모든 건 의미 없다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 딸을 구해주려 한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에블린과 소통이 되지 않아 슬퍼하던 마음 따뜻한 남편의 용감한 모습을 보며 다정함이 힘이었음을 깨닫고, 의사소통하며 협력하는 과정에서 남편과 결혼하지 않을걸-하며 후회하던 초반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토록 에블린이 싫어하던 가짜 눈알은 사실 다정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제3의 눈이었다. 에블린은 제3의 눈을 이마에 붙이고 적들을 물리친다. 온갖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정신없이 펼쳐지는 전투씬도 화면만 보면 B급 같지만 스토리를 알고 보니 AAA급 영화라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코믹한 장면에서 눈물이 터지는 의아함을 아마 영화관의 모든 관객이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구원하려는 멀티버스 히어로물’ - 누군가 나에게 이 영화가 어떤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모든 진리를 깨닫고 만물을 사랑하라. 그리고 현재, 네가 선택한 삶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정신없는 액션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감독의 똑똑함과 창의력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