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자신 Nov 24. 2020

지금은 환원하는 시간, 그래서 외롭지 않다

내가 줄 때 비로소 받은 것을 세어보게 되는 엄마의 시간.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도 더하고 빼는 셈법이 분명 있는듯하다. 나는 상대에게 열을 주었는데 하나만 돌아왔을 때 느끼는 실망,  분노는 결국 쌓이고 쌓여 관계를 망가뜨린다. 등가 관계가 정확하게 딱 맞지 않더라도 주고받는 정도의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더 주고 덜 받은 쪽은 상처 받기 마련이다. 받은 사람은 몰라도 준 사람은 기억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러나 앞서 말한 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바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다.


나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받은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사실 지금도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순 없겠다. 자식으로 살아온 세월은 30년이 넘지만 엄마가 된 시간은 이제 불과 삼 년 남짓이니 말이다. 그러나 엄마로 살아본 지난 삼 년의 시간은 나의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엄마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시간을 헤아려보게끔 했다. 그렇다. 엄마의 30대, 40대, 50대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란 명함마저 더해진 60대까지 나는 계속해서 딸이란 이름으로 엄마의 시간을 파먹고 있다.




'육아휴직'중인 워킹맘의 정체성에 맞게 나의 하루는 육아로 시작해 육아로 끝을 맺는다. 나 같은 경우 주중에는 첫째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고 저녁에는 남편이 아이들 목욕과 설거지를 도맡아주고 있어서 괜찮은 편이지만, 오히려 남편이 바빠 혼자서 첫째, 둘째와 24시간을 보내야 하는 주말은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시간이다. 3살 첫째 밥을 챙겨 먹이며 나도 밥 한 숟갈 뜨려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제 막 5개월 지난 둘째가 잠에서 깨 울어대기 시작한다. 그래도 둘째라고 2,3분 정도는 울음이 커지는지 다시 잠잠해지는지 간을 보지만 울음의 강도가 세질 때면 여차 없이 밥숟갈을 내려놓고 안아줘야 한다. 칭얼거리는 둘째는 품에 안고서 첫째와 함께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 점심식사를 어찌어찌 마치면 오후 2시 정도가 된다. 그러고 나서 두 아이 모두 낮잠을 자준다면 정말 그날은 성공이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여간해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엄마의 체력이 방전 직전에 갔을 때 비로소 뒤늦게 잠이 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럴 땐 아이들 옆에 누워 같이 뻗어야 하는데 왠지 모를 억울함에 잠도 오지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으면 어릴 적 내가 열이 날 때 엄마가 머리에 대어주시던 물수건의 서늘함이 이마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 지금은 내가 받은 것을 환원하는 시간. 억울해하고 외로워하기보단 천천히 이 환원의 기쁨을 즐겨보자. 무조건 다 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놓고 왜 나는 엄마처럼 안되는 걸까 자책하지도 말고 그냥 딱 나의 속도로 이 시간을 지나가 보자.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 모두 이제는 점점 당연한 일이 되지 않고 있다. 나도 내가 제도권 속에서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다 겪었다고 해서 나만 어른 입네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우리 모두 누군가의 시간을 담보 삼아 이만큼 살아왔기에 지난 시간 받은 것을 헤아려보며 그것을 어떠한 모습으로라도 환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유독 '육아'라는 단어 앞에 자주 따라붙곤 하는 '독박'이라는 단어, 언제부터인가 참 불편하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생겼을까 싶지만 결국 이 단어가 엄마들을 '억울하고 외롭게' 만들어 버리는 게 아닐까.

환원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려야 할 축복받은 육아가 누군가는 독박을 씌우고 또 누군가는 그 독박을 써야만 하는, 괴롭기만 한 시간이 되어선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덮어놓고 다 참아내고 다 내가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나도 절대 그렇게 못한다) 그저 오늘도 말 안 듣는 아이와 실랑이하며 말 못 할 억울함과 외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내가 그동안 조건 없이 받았던 그 누군가의 사랑과 시간들을 소환해본다면, 부글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고 올라갔던 목소리의 옥타브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 나에게 기꺼이 내어준 시간을 발판 삼아 여기까지 나아왔고 자연스레 그 시간을 또 누군가에게 돌려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끊임없이 더하고 빼는 의미 없는 셈법에서 벗어나 그저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며 외롭지 않게, 즐겁게,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닥치고 쓰다 보면 나오던데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