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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자신 Nov 30. 2020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가장 찬란했던 그때

무용함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하여

며칠의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친구에게서 똑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노래 한 곡을 링크해서 보냈는데, 적재의 “반짝 빛나던, 나의 2006년”이란 노래였다. 06학번 스무 살, 어찌 보면 내 인생 가장 찬란했던 시기에 만난 친구들이 노래 한 곡으로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해주었다.


우리는 왜, 미숙하고 실수도 많았던 스무 살의 그때를 '가장 찬란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때의 우리는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래서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크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때도 어김없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성적표는 때가 되면 따박따박 날아들었지만, 그 부담감은 고교시절 입시를 준비하며 느꼈던 압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이었다. 나 스스로 내가 가진 것들을 마음껏 낭비해보기도 하고, 때론 아무것도 아닌 일에 크게 웃고 크게 울며 주어진 나날을 온전히 나를 위해 써보았던 것 같다.


2006년의 나는 가능성, 그 자체였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누구든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한없이 철없던 스무 살의 나. 몇 장의 사진 외에는 그 시절의 나를 뚜렷하게 남겨 놓은 게 없지만 그저 '스무 살'이라는 단어가 주는 반짝임, 그 무용함이 가진 아름다움만으로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기에 충분하다.




아이들을 키우며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고 메이지 않은, 누구에게도 이용되지 않은 존재가 주는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다만 아이들은 자신의 가장 무용한 시절을 스스로 기억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사회에서 '어른'이라 정해주는 나이 중 가장 어렸던 '스무 살의 우리'가 스스로 기억해 낼 수 있는 우리의 가장 무용한 시절이 아닐까 싶다.


스무 살의 찬란함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빛을 점점 잃어가고 취준생, 직장인, 미혼, 기혼 등 사회가 분류해 놓은 여러 기준을 들락거리며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닐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어선 안 되는 나이가 돼버렸다. 하지만 정해지지 않은 것보다 정해진 것이 훨씬 많아 보이는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찬란하게 빛나진 않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여백을 발견하고 그것이 주는 조그마한 가능성에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그 여백이 너무나 작은지라 그것이 아직 나에게 남아있음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우리 모두 이미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쓰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용하다. 분명히 아직 정해지지 않고 정의되지 않은 여백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 삶은 빛나지 않더라도 여전히 아름답고, 두근거리며 희망차다. 부디 오늘은 세상이 정해주는 내 모습으로만 살지 않고, 내가 나를 조금 더 알아봐 주는 하루가 되길, 친구들이 보내 준 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스스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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