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돌맘 Jan 25. 2022

6. 가장 행복했던 순간

"Soyeon, can you hear me? "

맞다, 내가 미국에서 수술을 한 거였지...

마취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영어를 들어야 한다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커튼 하나 사이로 할아버지 한 분의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그 어르신도 나처럼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퇴원 직전에 제법 강력한 진통제를 간호사가 보는 앞에서 먹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음식을 먹어야 약을 복용할 수 있었다. 크래커, 애플소스, 진저엘, 주스 등등 있는데 뭘 먹겠냐 묻는 간호사 선생님의 질문에,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 불평을 하시는 중이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면 뭘 먹으라는 거냐, 여긴 식당이 아니다 등등 양쪽의 예의를 차린 듯 하지만 팽팽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내 침대 옆으로 들어온 간호사 선생님이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며, 넌 뭐를 먹겠냐 물어왔다. 나도 모르게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데 했더니 그럼 퇴원 안 시켜줄 거야 농담을 건네며, 아프지 않냐 어지럽지 않냐, 수술은 깨끗이 잘 되었다, 수술에 관한 설명을 퇴원 전에 들을래 아니면 내일 오전에 전화로 들을래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네 친구에게는 연락을 했고, 일단 진통제를 먹어야 퇴원 서류 갖다 준다는 말에 애플소스를 청하고, 수술부위를 더듬어봤다. 압박붕대를 꽁꽁 둘러놓아서인지 마취약의 효과인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수술 시작 전에 몇 시냐 물었었고, 마취에서 깨며 몇 시냐 물었기에, 혼자 계산을 해보니 수술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 반 정도인 듯했다. 그럼 아주 오래 걸린 건 아닌 거니 수술하면서 새롭게 생긴 변수는 없나 보다, 애써 안심을 해보려 했다.

사인을 해야 하는 서류가 한 뭉치,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알약 하나와 물 한 컵을 들이켜고 나서 도와줄까 묻는 말에 나 혼자 할 수 있을 거 같아 하고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혼자 일어나 나가려니, 화들짝 놀라며 휠체어를 끌고 와 빨리 앉으라 하면서, 친구가 병원 입구에서 차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준비 다 되었으면 가보자~하고 안내를 해주었다. 빨리 회복되길 바라고, 불편한 점은 언제든 연락하고 집에 가면서 꼭 진통제 픽업해서 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혼자 걸어서 타고 올라갔던 엘리베이터를 반나절만에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구나...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의 인생일진대, 얼마나 미련하고 욕심 가득한 삶을 살아온 걸까, 그래도 반나절만에 퇴원이니 감사해야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제법 쌀쌀한 11월 첫 주의 오전 시간, 병원 입구에 차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교회 언니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수고 많았다고, 수술 잘 되었다니 걱정 말라며 어서 빨리 집에 가 쉬자고 나를 다독여 챙겨주며, 출발을 했고, 언니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다니는 예전의 하이웨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로운 길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었구나... 매일 오가던 이 길, 차가 밀리고 거리가 멀어 힘들다 불평할 줄은 알았어도, 내가 직접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 휠체어가 아닌 내 두 다리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소소한 일상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눈물 나게 감사한 일이었다.


언니네 집 앞 약국에서 처방해준 진통제를 픽업하고, 집으로 들어와 서울의 남편과 친구들에게 온 수많은 문자들을 보면서 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 졸이며 내 수술시간 동안 기도로 함께 해주었다니, 감사하고 죄송하고 든든했다. 간단히 문자로 답변을 하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내 곧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서 밥 먹고 약 먹어 얀다며 조심스레 깨우는 언니 목소리에 식탁 앞에 앉아서, 언니가 정성스레 끓여준 죽을 먹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먼저 일어나 방으로 돌아와 누우려는데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결국 그 맛있는 죽을 나는 한 숟가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탈진한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데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 문자가 왔다. 수술 경과도 궁금하고 해서 연락했다며 몸은 좀 어떻냐 묻기에, 대강의 설명을 했더니 수술 시간 따져보니 림프 전이는 없었나 보다며, 마취 다 풀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물 많이 마시고, 퇴원 직전에 먹고 나온 진통제가 제법 센 거라 그것도 울렁거릴 수 있으니 아주 많이 아프지 않으면 그냥 일반 진통제 먹고 푹 자라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서부에 거주하는, 그것도 환자를 봐야 하는 친구가 시간 맞춰 수시로 연락을 해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하고 든든한 일인지, 또다시 나는 행복하다 확인을 하는 순간이었다.

친구의 말대로 밤새 물을 2리터는 마셨고, 중간중간 화장실을 가느라 일어나긴 했지만 속도 한결 편해지고 마음도 안정이 되어서인지 그야말로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내다본 바깥의 풍경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온 집안 향긋한 커피 냄새도 여전했다. 나 때문에 하루 휴가를 냈던 언니, 남편 장로님의 출근길 배웅을 하고, 정성스레 마련해놓은 아침을 먹고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거실의 소파에서 담요를 둘러 덮고 늘어져 티브이를 켰다. 문득...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퍼져있어 본 게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가물가물 했다.

매일매일의 동선을 시간별로 짜서 움직이려 했고, 내가 최선을 다하면 다 잘 될 거다 생각했고, 내 기도는 늘 "하나님, 아시잖아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저를 붙잡아주세요"였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들들 볶아가며 매일매일 무리를 해가면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며 살짝 뿌듯해지려는 찰나, 하나님은 나에게 꿈과 같은 긴 휴가를 강제로 주셨다.

"너 이래도 안 쉴 거니? 다 내려놓고 잠깐 동안 나만 보고 지내라, 알았어?" 하시면서... 동동거리며 나 자신을 스스로 야금야금 갉아먹어가며, 내가 지금 무리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아채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나를 위해, 그야말로 쉬지 않을 수 없는 세팅으로 붙잡아 놓으셨다.

그렇다... 이쯤에서 한 번쯤은 나만을 생각하며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아보고, 비록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라 해도 나를 좀 칭찬해주고, 이 정도면 되었다 한숨 돌리며 쉬었어야 했다.

한국-미국-한국-미국... 몇 년에 한 번씩 삶의 터전이 바뀌는 엄청난 경험, 그 와중에 아이를 낳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둘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애를 키우며, 뒤늦은 공부 욕심에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 보다도 어린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듣고, 연주에 논문에... 생각해보니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내 지난 20여 년의 삶은 치열했고, 늘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뭔지 모를 내 안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나는 공부와 육아와 기타 등등 내 욕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땅에서 홀로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게 되는 상황이 닥치니 그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여러 가지 감사의 제목들이 떠올랐다. 수술실에 그간의 힘들었던 감정들, 가슴 아픈 기억들일랑 암 조직과 함께 다 두고 나오라던 선배 언니의 조언처럼, 수술을 받고 나니 마음 한구석 응어리져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풀린 느낌이었다. 그저 모든 분들이 감사하고, 모든 상황이 감사하고, 그야말로 마음이 몰랑몰랑 부드러워지고, 내가 봐도 얼굴 표정이 환해진 것 같았다.

산후조리를 하듯 편히 며칠을 언니네서 보내고, 이곳에 이사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나를 픽업해 함께 우리 집으로 왔다. 대학원서를 써야 하는 막내딸도 내팽개쳐놓고, 손수 만든 음식들 잔뜩에 빨랫감 만들면 귀찮다며 자기침낭까지 싸들고 온 고마운 친구는, 그날 저녁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던 자기의 결혼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마치 간증집회를 하듯 귀하고 흥미진진한 얘기들로, 나를 감동하게 해 주었고, 다음날 점심까지 꼬박꼬박 챙겨주고 그날 이후로도 며칠을 간호도우미처럼 출퇴근을 해주었다.

엄마도 일찍 천국 가셔서 안 계시고, 바다 건너 사는 죄인인 딸내미가 암수술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차마 혼자 계시는 아버지에게 차마 할 수 없어서 전전긍긍하며 외롭던 나에게, 하나님은 정말로 많은 주변의 친구들을 통해서 넘치는 사랑과 간호와 보살핌을 받게 해 주셨고, 그 사랑과 기도 덕분에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내가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의 하루하루는 내 인생 최고의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들이었고, 몸도 마음도 점차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암수술 후, 그 회복의 시간을 눈물 나는 행복의 시간으로 채워주신 수많은 내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이 글을 빌어 엎드려 감사를 드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