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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맘 Jan 30. 2022

7. 수술 은 정말로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수술도 무사히 끝났고, 2주 후 수술해준 유방외과 선생님과의 미팅도 마치고 나니 어느덧 11월 중순이 되어갔다. 직장 보스의 말과 의사 선생님 말대로, 나는 수술 후 2-3일 후엔 앉아서 레슨도 가능하고 외출도 문제가 없겠다 생각이 들만큼 괜찮아진 듯했다.


수술 이후 첫 번째 외출은 막내의 학교 연극 공연이었다. 수술이 월요일이었고 금-토요일 두 번의 공연이 있었는데 당분간 사람 많은 곳은 피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어쩌나 고민하다가, 학교 전체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금요일 공연을 피해 토요일에 가보기로 했다.

"엄마 힘들면 안 와도 돼" 하는 막내한테, "아니야, 엄마 멀쩡해, 이따가 만나~" 해주고 길을 나서려는데 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가지 말까... 그냥 집에서 쉴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컨디션도 체크해볼 겸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예상보다 긴 시간의 공연, 중간에 인터미션 도 있고 제법 많이 준비한 표가 나는 아이들의 공연이었고, 나름 메시지도 있었다. 엄마의 수술이 얼마나 막내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 고맙고 한편 마음이 짠했다. 멀지 않은 거리의 학교였고,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공연을 보고 왔는데, 긴장을 한 탓인지 수술의 영향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아직은 안 괜찮은 거구나... 그래도... 감사히 생각하자...'


주말을 푹 쉬고, 다시 시작되는 일상, 고맙게도 학부모들은 대강의 내 설명에 눈치를 챘는지 필요한 만큼 레슨을 쉬고 컨디션 회복되길 바란다고 문자와 이메일, 전화를 해주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이미 온라인 레슨은 모두에게 익숙한 상태였고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었다. 온라인으로 만나는 아이들이 새삼 귀하고 반갑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우울해지려는 마음도 걱정스러운 마음도 조금씩 잦아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피곤했다... 두 시간을 앉아 레슨을 하면 두 시간을 쉬어야 했다. 그래도, 주변분들의 따뜻한 챙김 덕분에 나는 매 끼니 무엇을 먹어볼까 고민을 할 만큼 냉장고엔 정성스러운 음식으로 가득했고, 먹고 자고 쉬고 가끔 조정한 일정으로 레슨을 살살해가면서 예전의 일상을 유지해보려 했다.

그렇게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고, 어느덧 추수감사절이 되어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왔다. 아이들의 학기가 얼마 안 남았으니 마무리하고 겨울 방학해서 오면 그때 말하기로 맘먹고 있던 차였기에, 뭔가 묻고 싶어 하는 눈치의 큰애를 애써 모른척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들과 맛있는 음식도 먹고, 친한 언니네 저녁 초대도 받아 아이들과 함께 가서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학교로 가져갈 준비물들을 챙겼다.

모두가 돌아가고 나서 다시 혼자 남게 되고, 수술 후 그다음 치료를 위한 의사 면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종양외과, 방사선종양외과 선생님 두 분과의 면담 일정이 잡혔고, 그래도 혹시나 수술 후의 모든 결과가 이리도 좋은데 뭔가 피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해보았다. 또다시 잠을 설치는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서울에서 남편이 도착했다.


사람 좋고 마음 약한 남편에게, 처음 내 암 진단 소식을 알리기까지 며칠의 고민을 했다. 결정이 내려지면 불도저처럼 앞만 보고 기타 등등의 자잘한 것들은 그다지 맘을 쓰지 않는 편인 나와는 달리, 남편은 모든 경우의 수를 꼼꼼히 따지며 때로는 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는 편인지라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혼자서 기러기 아빠로 지내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다니던 회사에 큰 변동이 생겨 내가 아이들과 미국으로 떠나온 이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도 말 꺼내기가 쉽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데, 막상 이런 일이 닥치고 나니, 나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 되어가는 듯했고, 의외로 남편은 대범하고 침착하게 나를 다독여주고, 내가 혼란스럽고 흔들릴 때마다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농담처럼  "내가 짝가슴이 되고, 민머리가 되어도 괜찮아?" 하고 물으니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며 가볍게 받아넘겼지만, 마음 약한 남편이 그 말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중에 내가 좀 여유가 있어지고 나서 생각해보게 되었더랬다.


서울에서 긴 휴가를 받아 와이프의 치료를 도우려고 온 남편은, 살뜰하게 막내를 챙기고, 뭔가 걱정스러워 보이는 큰애도 챙기고, 무엇보다도 암환자가 된 와이프를 위해 온갖 집안일과 운전과 음식까지, 정말 일당백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든든하고 따뜻한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때문에 의사와 면담을 하는데 함께 갈 수도 없었고, 후에 받게 될 15번의 방사선 치료에도 건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추운 동부의 날씨에 바깥 주차장에서 와이프의 치료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를 하며 가슴을 졸일 뿐, 오롯이 나 혼자 이 모든 과정들을 견뎌내야 했다. 아마도 그 사실이 나를 이따금 잠 못 이루게도, 잠에서 벌떡 일어나는 꿈을 꾸게도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비단 나뿐 아니라 모든 암환우들이 겪어야 하는 가장 힘든 점은 다름 아닌 '나 혼자서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다'는 것, 하나의 과정이 끝나면 그다음 과정이 또 기다리고 있고, 그 모든 과정이 다 끝난 다고 해도 암 이 주는 공포는, 재발과 전이, 결국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바로 그것이었다. 수술을 하면서 느꼈던 가슴 따뜻해지는 가족, 친구,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행복했던 그 시간은, 결국 나에게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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