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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간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는 존재

by ZAMBY



주말이면 교회에 간다

한국에서는 교회에 가지 않던 내가

미국땅에서는 무슨 일인지 열심으로 교회에 간다.


처음에는 교회에 가야 미국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주변 경험자들의 조언 때문에

교회에 갔다.


나는 한국에서도 마음이 극도로 힘들거나 내 자신이 초라할 때 교회에 가곤 했다.

극도로. 힘들기 전 단계에는 절에 갔다.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 같은 고통은 절에 가서 빌고

멘탈이 다 털리고 이건 도저히 내 힘으로는 안된다 싶을 때 쭈뼛주뼛 교회를 찾았다.

신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딱히 정해놓고 다니는 교회도 없어서 주변 지인들의 손을 잡고 그곳에 갔다.


교회에 가면 좋았다

모두가 나에게 친절하고. 내가 소중한 사람이란 기분이 들었다. 성경 구절은 삶의 지혜를 담아놓은 듯 필요한 말씀으로 가득했고.

설교도 목사님들의 컨디션이나 개인 스타일에 따라 편차는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킨실타래마냥 도무지 풀방법을 못 찾는 내 마음의 번뇌를 잠시 내려놓게 했다.

그렇게 몸이 아프면 겨우 찾아가는 동네 가정의학과를 찾듯이 나는 교회를 찾았다. 아주 가끔.


그런 도구적 신앙생활을 하던 나는

역시나 목적의식을 가지고 미국의 한인교회에 발을 들였다.

심지어 교회라고는 어린이날 친구랑 놀러 가본 게 전부인 두 아이들을 데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성경에는 뼈를 때리는 구절들이 많았다.

악인이 형통함을 부러워 말라. 그들과 가까이 지내지도 말라.

잠을 사랑하지 말지니, 네가 가난하게 될까 염려함이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등등.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설교로 듣게 되었다.

좀 충격적인데.

여호와라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착한 남자에게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라는 남자는 제단에 아들을 올리고 칼로 치려고 한다

결말은

해피앤딩이긴 한데 그 내용이 너무 섬뜩해서 대체 이 구절로 무슨 지혜(?)를 전하려는 건가 했다.


여기서 신앙이 깊은 자와

일반적인 사람 간에 차이가 있다.


종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유도 없고. 결말을 몰라도 그 말을 따르는 행위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다. 자아에 대한 부정이다.

기독교에서 믿는다는 행위는 절대자의 계획하에 그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꽃길이던. 가시밭 길이던.

다 절대자의 의도가 있고.

나는 그 길 위에 겸허하게 엎드린다.


이 나이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나의 나의 것이고.

나의 이성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자유의지로 나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왜 내가 나를 내려놓고 몇 천년 전에 쓰여진 책의 말만 믿고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인 순종을 해야 하지.

나는 내 이성의 문턱에 걸려서 늘 제자리였다.


마음이 힘들다는 것은,

마음에 갈등이 있다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무상이라던가, 무아라던가 이런 개념으로 내 마음의 애욕을 다스리고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나 스스로 벗어나는 게 어디 쉬운가.

나는 옳은데, 나는 착한데,

세상이 그릇 되어서, 저 인간이 파렴치해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나의 선함으로 인한 이 고통을, 혹은 나의 무능함으로 인한 이 절망을

백 팔배를 하면서 온전히 달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좀 수월하다.

생각을 한 끝만 바꾸면.

나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고, 그 절대자에게 미리 정한 뜻이 있다.

나의 자아는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절대자의 것이므로,

나는 내 자아를 붙잡고 세상과 대적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절대자가 설계한 세상의 순리와 이치 위에서 그분이 정해준 대로 가는 존재 일뿐.

그래서 늘 기도하면서 그 분과 소통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나의 창조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번 챕터의 결말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 목차를 향해 가야 한다.

또 내 짧은 인생 어디엔가 그분이 만든 또 다른 무대와 장치가 있으므로.



내가 미국에 와서 생각해 본 기독교의 세계관이다.

만유인력 - 상대성 이론을 넘어 - 양자역학의 시대로 향하는 지금.

나는 가끔 인간의 이성과 우주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할 때,

정말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패턴이나 수학으로 설명 가능한 영역 외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영역은

어쩌면 신, 이 가끔 실수로 혹은 재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리고 나의 죽음, 혹은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생각하며

내가 신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 섭리를 순순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두렵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후부터 죽음, 질병, 가난, 사고, 전쟁, 이런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많은 걱정을 하고 또 검색을 통해 그 불안을 증폭시킨다.


내가 만들어내는 수십 가지의 걱정과 불안들을 다스리기 위해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정신분석 전문의를 만나 볼 수도 있고,

108배를 하거나

명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미국에서 몇 가지 도전을 하고 있다.

능력개발, 자아실현, 미래준비 이런 것들.

그리고 나는 종교, 혹은 신앙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내 남은 인생 동안 내가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나를 더 사랑해 줄 수 있는 '행복한' 믿음에 관하여

(그 동기는 역시나 도구적이긴 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인생에

그 혼돈과 불안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진리'를 찾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불변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진리'

나약함으로 인한 의존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강인함으로,

내가 신을 경외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신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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